정진규 시인 / 안개 이른 새벽 내가 아직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 집에 제일 먼저 당도해 있는 건 한 병의 우유와 조간 한 장 풀밭도 지나왔는지 촉촉이 이슬에 젖어 있었다 이로써 오늘도 안녕이었다 내 일용할 양식은 언제나 든든했다 한 병의 우유만으로도 내 삼시 세끼는 넉넉하였으며 한 장의 조간만으로도 내 영혼의 가난을 다스릴 수 있었다 허지만 이 가난한 용납이 요즘은 어려워진다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도 당도해 주지 않았다 하늘나라의 통신에 의하면 이른 새벽길을 정체불명의 안개가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나날이 안개의 숲이 깊어만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하리, 이제는 나도 마중을 나가야만 하겠다 그간 나의 헛간에서 잠들어 있던 단단한 골격의 도끼 그가 가장 완강하게 일어서고 아아, 마침내 한 그루씩 넘어지는 안개의 벌목. 이제는 나도 마중을 나가야만 하겠다 정진규 시인 / 껍질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나온 나는 또 한번 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 그렇게 나가서 저 언덕을 아득히 걸어가는 키 큰 내 뒷모습을 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를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준비 중이다 확인 중이다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 내 껍질이 이 다음 강원도 정선 어디쯤서 낡은 빨래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 쨍쨍한 날 보송보송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흔한 매미 껍질 같이는 싫다 그건 너무 낡은 슬픔이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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