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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석희 시인 / 법고소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4.

주석희 시인 / 법고소리

 

 

산사에 노송이 서 있다

불현듯 누군가의 손바닥에 썼다는

, 편 설화(雪花)가 핀다

새들이 울음을 거두고

잠잘 곳을 찾아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데

-당당

동안거에 든 소나무가 휘청 잡념을 털어낸다

해묵은 기왓장들이 일일이 돌아눕는다

법당 뒤 검은 바위가 지워지고

산사를 유영하며 고요를 해찰하던 풍경소리가 지워지고

숲 속으로 저녁의 가녀린 손가락이 마저 지워진다

다급하게 법당으로 끌고 들어간 발자국이 돌계단 위에서

둥당-

산사에서 뿌리보다 깊게 잠든 영혼들

잊었던 아흔아홉 칸의 귀가 차례차례 열리고

갈 길이 어두워진 내가 정수리에

차가운 깃털을 이고 돌아서려는데

어둠은 또 누구의 손을 빌어 여기까지 미명을 밀고 왔는가

일주문 앞에 당도한 저녁이 귀가 밝은 얼굴로 합장하고 있다

어지럽게 미끄러지며 등을 떠미는 설화,

깨진 기왓장 같은 발자국일랑 두고 가거라

동당당당

번호표 노송에 질끈 매달고

적념(寂念)에 든 시인의 눈빛처럼

 

 


 

 

주석희 시인 / 식사의 법칙

 

 

절벽 바위틈으로 어미 독수리가 날아든다

두 개의 괄호가 샛노랗게 열린다

어미가 새끼 한 마리에게 집중적으로 먹이를 쪼아 넣는다

먹이를 다 받아먹은 새끼가

다른 새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못 본 척,

어미 독수리가 절벽으로 뛰어내린다

분홍색 가슴에 제 부리를 묻고 쓰러져버린

눈꺼풀이 꽃잎처럼 가볍다

검고 팽팽한 그림자

어미 독수리가 둥지 위를 빙빙 돈다

목구멍에 박힌 가시를 토해 내듯

날카롭게 토막 나는 울음소리

맹렬하게 새끼가 새끼를 뜯어 먹는다

서서히 괄호 하나가 지워진다

바위틈에서 수없이 감겨버린 눈동자가

새로운 동공으로 밝을 때까지

피비린내를 박차고 가파르게

절벽을 날아오를 때까지

허기는 그들 앞에서 원죄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모성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슬픈 식사의 법칙이 있다

 

계간미네르바(2015년 가을호)

 


 

주석희 시인

1966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 (본명 주영숙). 계간 포엠포엠2013년 겨울호에 이타적언어4편이 당선되어 등단. 2019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인학교냇물 회원. 한국작가회의 분과 회원. 2015년 중봉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