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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택 시인 / 기찻길 옆 산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5.

김기택 시인 / 기찻길 옆 산길

 

 

달리는 창으로 내다보니

흙길 하나가 구불거리며 산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

숲 사이로 올라가는 좁은 산길이다

전동차의 속도는 즉시 그 길을 지우고

터널의 어둠으로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을 친다

 

며칠 후 다시 차창을 내다보니

길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아직도 숲 사이 좁은 산길로 올라가고 있다

열심히 구불거리고 있지만 길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발자국들만 먼저 올려 보내고 저는 그 자리에 있다

꾸물거리는 길을 앞질러서

밤과 아침만 번갈아 몸 바꾸며 바삐 지나간다

길이 여태껏 그 자리에 있어서

숲도 산도 하늘도 그 주변에 멀거니 있다

길이 다 지나가는 걸 보려다가

몇 년째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

추위와 어둠에 속속들이 익기만 하고 떠나지는 못하고 있다

 

기찻길 옆 산길은

길 밑으로 뻗어 있는 뿌리들과

길가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 자라는 속도를 쳐다보고 있다

전동차는 제 속도를 다해 달려왔지만

몇 달째 산길 옆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김기택, 갈라진다 갈라진다, 문학과지성사, 2012

 

 


 

 

김기택 시인 / 선거 유세

 

 

연사의 급한 마음이 튀어 침으로 나온다

침은 더 많은 말들을 만들어내려고

입 안 가득 거품을 일으켜 혀 주위에 돌리고

꿈지럭꿈지럭 혀도 둔한 뿌리를부지런히 움직인다

건조한 말들은 침 속에서 자꾸 물기를 빨아들이고

혀는 지렁이처럼 점점 하얗게 말라가는 몸으로

물기를 찾아 침샘으로만 들어가려 한다

순간,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느린 혀가

미처 이빨을 피하지 못해 지끈 깨물린다

'양심' '! !' 으로 발음되어나온다

쓰린 상처에 급히 바람을 넣으며

혀는 힘차게 꼼지락거려 그 발음을 수정한다

연사는 억지로 공기를 밀어 넣어

물기 없는 찐득찐득한 침을 꿀꺽 마신다

침은 목구멍에 달라붙어 말로 가려는 공기를 막는다

당황한 얼굴에 박히는 수많은 시선들

큰기침! 이어 계속되는 진짜 기침

죄송합니다 콜록 유권자 콜록 여러분 죄송합니다 콜록

마른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지렁이처럼

혀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꿈틀거려본다

드디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말에서 침이 갈라져나온다 말에서

물기가 모두 빠져나온다 말들이 뜨거위진다

! ! 몇 배로 튀겨진 말들이

확성기마다 쏟아져나온다 박수 소리 위에 쌓인다

 

 


 

 

김기택 시인 /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치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매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학교대학원 국문과 박사. 1989한국일보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 『.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6회 지훈문학상. 상화시인상.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