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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신선 시인 / 희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6.

홍신선 시인 / 희망

 

 

운두 낮은 봄 햇볕 위에서

아이들이 제 신발 문수보다 큰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달린다.

아침 등교 길의 책가방 속에

하루 내내 꾹꾹 눌러 쓸 재생지 노트 속에

개봉 안 된 싱싱한 미래를 담고 달리는

저 철부지들

마치 하늘의 여울을 치고 달려 내려가는 새끼 연어 떼처럼

밝음 지나 더 밝음 속으로 가는

미성년의 지느러미들,

골목마다 도로마다 부표등처럼 떠서 깜박인다.

머지않아 시간 밖으로 튀어나가

시간 밖 떠돌이 정신으로 자유롭거나

제 마음 갈피에 어느 이역의 모험들을 적으며

그러나 다시 돌아오리라

몸피 큰 어른들로 돌아오기 위해

운두 낮은 봄 햇볕 위에서 아이들은

어제 오늘 아마도

내일 제 신발 문수보다 큰 긴 항적들을 신고

아침 등교 길을 달리리라.

 

 


 

 

홍신선 시인 / 시인의 초상

 

 

동네 이면도로 움푹 팬 웅덩이 빗물에

웬 자동차 엔진 기름 한 방울

누가 유실한 수급首級처럼 달랑 목 위만 내놓은 채 떴

둘레의 곁들 튕겨 내 가며

둥글게 안으로 안으로만 몸통 돌돌 말고

무릎 껴안은 그는

쉽게 저를 해체하거나

그 무엇에도 함부로 뒤섞이지 않는다

다만 몇 됫박 햇볕에

갓 지은 절처럼

살 깊이 내장된 휘황한 단청들을 내보일 뿐,

 

그런 기름 한 방울 만드느라

제 삶을 오로지 탕진했던 사람이 있다

 

 


 

홍신선 시인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65시문학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 거듭 살아도』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故鄕에서』 『다시 黃砂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홍신선 전집』 『우연을 점찍다가 있음경기도문화상,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 서울예대 강사, 안동대, 수원대 교수, 동국문학인회장 역임. 현재 동국대 문창과 교수로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