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 시인 / 항아리 속의 시인 -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둑을 위하여 항아리는 고요하다 눈부신 달빛 아래 묵묵히 침묵하고 있다 지금 저 항아리 속엔 사십인의 도둑이 숨어 있다 저마다 잔뜩 웅크린 채 숨죽이고 바깥에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깊은 밤 칼을 빼들고 집 안으로 쳐들어와 사정 없이 우리의 목을 베어갈 악당들이 항아리 속에서 손톱을 깨물며 견디고 있다 사십 개의 항아리가 일제히 부서지는 순간 집 안 가득 번져나갈 함성과 비명소리 항아리는 고요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어둠 한 가운데서 기다리고 있다 신호가 떨어져 어떤 부스럭거림이라도 일어나기를 잠자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깨어 날 수 있기를 서서히 항아리가 떠오른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십 개의 항아리가 허공에 떠올라 달빛을 빨아들인다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며 그윽한 술냄새를 풍기는 달빛 밤이 깊어갈수록 항아리 속엔 술이 차오르고 신호가 와도 술에 곯아 떨어진 도둑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남진우 시인 / 가시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애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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