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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호성 시인 / 금지된 삶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6.

김호성 시인 / 금지된 삶

 

 

문고리를 돌린다

화분에는 물이 말랐고 남은 이파리는 밖을 향해 눕는데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같이 죽을 사람 하나 없는 나는 미궁으로 간다

식은 난로 아래 잿더미는

본 적 없는 그림자를 화사하게 치장한다

간절하고 용서받고픈 자들의 적

그 앞에서 나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

칼을 들어 고개 숙인 영혼들의 어깨를 찌르면

그들은 몇 가지 제목을 발설하고 나를 추종하게 된다

원망하는 일은 한여름 도시처럼 질겨

폐가 망가진 시인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웅크린다

책장이 솟아오르고 수돗물이 쏟아지는 귀 아픈 소리도

흥얼거리는 자장가로 변한다

살인자의 왕인 그림자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거울을 간직하고 있기에

깨어나면서 평온을 느끼지 못하는 물건이

더 나은 육체를 바라는 일이 정말 부질없는지를

잠이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월요일은 가르쳐 준다

발자국에서 새어 나온 모자이크들이 부유하고 있으므로

어제보다도 천천히

누군가로 살아야 하는 숙명을 넘겨받았다면

나와 함께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없는 곳으로 가자

잠이 금지된 삶 속으로 가자

 

월간 현대시20192월호 발표

 

 


 

 

김호성 시인 / 질긴 숨

 

 

 네가 나를 창조했으므로 수많은 결핍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어떻게 너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 동에서 서로 마지막 글자에서 첫 글자로 살찐 거위처럼 걸어갈 뿐이다 홍수를 일으키는 엉덩이로 주저앉아야 세상은 뒤뚱뒤뚱 돌아간다 관자놀이를 움푹이 눌러도 죽어가는 후손들 살아나는 선조들 어마어마한 손이 느닷없이 이 대지 위에 내려앉는다 군중은 젖먹이를 향해 돌아선다 피투성이가 된 열사의 이름을 부르고 신들린 무당처럼 구급차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빙빙 돌고 있다 사회적이고 기술적이고 광대하고 생물학적인 거위를 모방하고 부추긴다 글을 휘젓는 물갈퀴는 유전자를 변형시킨다 온갖 질병을 휘몰아치게 하는 미세먼지에서 방사능으로 우리 모두가 하루는 침묵하는 피해자이다 하루는 정의로운 폭군이다 위생과 정복의 감각을 분간하기는 녹록지 않다 처음과 끝 사이에 놓이는 자는 곧바로 더러운 것이 된다 왕의 광장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서 힘껏 거리를 채우고 있는 너의 어깨 너머로 200인치 스크린 저 멀리 빙하가 사라지는 곳에서 검은 함대가 몰려온다

월간 현대시20202월호 발표

 

 


 

김호성 시인

2015현대시상반기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적의의 정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