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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림 시인 / 회음부의 노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7.

이경림 시인 / 회음부의 노래

- 예버덩 문학관에서*

 

 

여기 말들의 호젓한 쉼터가 있구나

지친 말은 쉬어가고 잉태한 말은 몸을 풀어도 좋겠다

 

세간에는 지금, 속도에 취한 말들이 금속성의 울음을 울고 있다

소음에 놀라 길길이 뛰며 기형의 말을 낳는 말도 있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 없는 아스팔트에서 말들은 아예 발바닥이 없어졌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 검은 벨트에 서면 누구라도 비명을 지르며 뛰지 않으리

 

그래, 여기서는 종일 숲으로 난 오솔길을 걷던 전생을 어슬렁거려도 좋겠다

이름 모를 풀벌레와 연애하고 사랑하고

꿈처럼 포동한 말 한 필 낳아도 좋겠다

 

유구히 떨어져 내리는 목련 한 잎이

어디서 시작된 누구의 말인지 곰곰 들여다보는 일도 괜찮겠다

오늘 처음 만난 말오줌나무처럼 뒤뚱뒤뚱

허공으로 달아나 보는 일도 괜찮겠다

 

후미진 것들은 얼마나 가득한가

후미진 것들이 얼마나 환한가

문득 돌아보는 일도 괜찮겠다

 

후미진 창턱

후미진 돌멩이

후미진 날의 노을은 얼마나 찬란한가

몸 기울여 보는 일도 괜찮겠다

 

그때, 만 리 밖에서 누가 램프의 심지를 돋우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날들을 슬몃 보여주기도 하리

그러면 당신은 공연이 가슴이 쿵쿵거려

 

자귀꽃은 왜 털투성이인가

밤꽃은 왜 비린내가 나는가

묻고 물으며 심심한 버덩길을 걸어 오르리

 

어느 길에서는 이마가 훤하고 입술이 진홍빛인

말 한 필 낳기도 하리

순간, 숲의 한쪽이 화르륵 날아오르고

천지는 텅 비리

막 태어난 울음이 노래처럼 지나가리

모르는 갈피들이 펄렁펄렁 넘어가리

 

7월에 눈이 내리더라도 놀라지 말자

사실 이곳은 시간의 밖

한 꽃의 회음부

 

*강원도 횡성에 있는 마을 이름

 

-아시아2015년 가을호

 

 


 

 

이경림 시인 / 지렁이들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물기 질척한 보도블록에 지렁이 두 분 뒹굴고 계십니다

한 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S?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 분,

천천히 하반신을 구부려

L……

하십니다. 그렇게 천천히

U?

하시면

C……

하시고

J?

하시면,

O…… 하시고

 

쬐한 가을 햇살에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마르는 줄도 모르고

그분들, 하염없이 동문서답 중이십니다

 

그 사이, 볼일 급한 왕개미 두 분 지나가시고

어디선가 젖은 낙엽 한 분 날아와 척, 붙으십니다

아아, 그때, 우리

이목구비는 있었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있었습니까?

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 번이나 C 하시고

나는 또 몇 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신생2014년 봄호

 

 


 

이경림 시인

194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1989년 계간 문학과 비평을통해 굴욕의 땅에서9편으로 등단.시집으로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잡아 먹자』 『상자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와 산문시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와 비평집 관찰의 깊이, 사유의 깊이가 있다. 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1회 윤동주서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