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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늘 시인 / 스너글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7.

오늘 시인 / 스너글러*

 

 

장미가 멈춘 북쪽은 신들의 방향

 

칼새는 사몽 속으로 날아오르면 일 년 동안 땅을 밟지 않고 비몽의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생의 바깥을 서성이는 너를 만나러

네 방향으로 간다

당신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린 불안이 질퍽거리는 어둠을 비집고 먼저 와 기댄다 뒤꿈치가 까지는 신발을 겨우 버렸다는 말을 건넨다 첫인사로 이보다 멋진 말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가는 곳은 북쪽

거친 당신의 발에 열두 시간 비가 내리면 가시가 순해지는 방향에서 블러드문이 뜨고 거기, 장미가 시든 곳에서 잠든 나의 새

 

밤이 오지 않아 바람길만 넓어질 때 잠들기 전 팔의 높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당신의 보랏빛 눈두덩이 위태로워 바람도 침을 묻혀가며 천천히 당신을 센다

 

팔을 조금 내려도 되겠습니까

 

불면의 바닥으로 흩어지는 것들을 토닥이며 당신이 묻는다 하현달이 더 아름다운 이유가 생각났나요

아니에요 저건 그냥 달

 

테베레강 하류에 고여 지금은 우리가 닫힐 차례

스무여드레 스무아흐레 다음은 그믐 꼭 끌어안은 우리

 

눅눅하게 들켜지는 그믐들

 

*포옹만 해주는 직업.

 

 


 

 

오늘 시인 / 안개꽃

 

 

꽃말은 평행선에 갇힌 무신론자들이 기록한다 안개꽃의 꽃말을 간절한 마음이라고 적으며 안개를 발화시킨 눈물은, 지운다

 

*

 

4월의 말은 안개에 갇힌 시간이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프리피야티

하늘에서 안개꽃이 한꺼번에 흩날렸을 때

뛰쳐나가 함박, 하얀 송이들을 맞으며

축제를 즐긴 사람들

 

엄마- 밖으로 나와 보세요 꽃눈이 와요 우리, 붉은 비쉬반카를 입고 춤춰요

 

안개꽃이

노란 대관람차와 아이들의 낮잠 침대를 끌어안고

타오르는 새벽 속으로

 

산딸기꽃이 피는 풍경의 염기서열마저 끊어진 자리

붉게 타버린 나무들의 정령만 안개로 남아

가장 먼 곳의 꽃을 피워 올린다

 

* 프리피야티와 체르노빌은 현존하는 최대의 유령도시. 원자력 발전소가 폭파되었을 때 위험성을 전혀 모르는 주민들이 방사능 낙진들이 눈꽃처럼 예뻐서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 맞았다는 당시 생존자의 증언.

 

 


 

 

오늘 시인 / 발푸르기스의 밤

 

 

빨강을 묻는 나를 위해 춤을 추는 너

허벅지가 맑아서 순서도 없이 색깔들이 피어올라

 

네 춤에는 툭 치면 넘칠 것 같은 물잔이 있어

 

입술이 번졌구나, 붉은 뺨을 가지기 위해서는 울음의 공기를 조금 빼야 하지

우리의 흰 머리카락은 괜찮은 하루들이었고 빨강을 감춘 건 너였을까 이제 이것은 농담이야

 

네가 사라졌다 내 농담이 그렇게 싫었나

달이 차오르지 않아서 모르겠네

빨강을 못 본다고 해서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선명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돌아서서 너의 손목을 묻는 흐릿한

사람들

네가 없는 나는 얼룩이 되는구나

 

너를 빨강해, 중요한 말일수록 몸속 가장 단단한 뼈에 박혀 꺼내기 힘들다는데 너는 살짝만 무릎을 굽혀도 보이는 계절

 

잿빛 동맥을 쥐고 와장창 웃는 푸른 꽃들 나를 위해 빨강을 췄구나

네 발등에 입을 맞추고 모닥불을 피워놓을게

가자 우리의 숲으로

네 푸른 피는 나무를 타고 오르는 선명한 리듬 완벽히 이해된 빨강이야 네 손가락이 바싹 마른 내 명치를 콕,

 

펑펑 쏟아지는 빨강

 

* 마녀가 춤을 추는 4월 마지막 날의 밤.

 

 


 

오늘 시인

2006서시로 등단. 2015년 한국문예진흥기금 수혜. 2020년 제10회 시산맥작품상. 2021년 제16회 지리산문학상. 시집 나비야, 나야(2017년 세종우수도서). 빨강해. <시계제작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