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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신 김대건·최양업 전] (53) 백령도 입국 시도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

[신 김대건·최양업 전] (53) 백령도 입국 시도

백령도 입국마저 실패하며 실의에 빠진 채 육로로 눈길 돌려

가톨릭평화신문 2022.06.26 발행 [1668호]

 

 

 

▲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선을 타고 백령도에 도착해 조선인 신자들을 만나 본토로 입국하려 있으나 해도상의 오류로 백령도를 찾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사진은 백령도에서 바라본 서해.

 

 

‘조선전도’ 없이 백령도로 항해

 

조선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대목구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그해 5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백령도로 떠났다. 두 사제가 백령도로 향한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보고에 따라 백령도 인근에 중국 산동 어선들이 자주 나타나기에 접선이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이 섬에는 많은 산동 어부들이 떼를 지어 모이므로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큰 선단을 만나게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같은 편지에서)

 

지난 호에 밝혔듯이 메스트르 신부는 백령도로 떠나기에 앞서 파리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김대건 신부가 부제 때 그린 ‘조선전도’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전도’가 지리학적으로는 그리 정확하지 않지만, 백령도 인근 섬과 해안들을 인지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해서다. 하지만 ‘조선전도’는 두 사제가 백령도로 떠나는 날까지 오지 않았다.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9년 5월 마카오에서 온 배(최양업 신부 서한에는 프랑스 함선, 사식휘의 「강남전교사」에는 모래선이라고 적혀 있다)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백령도로 항해했다. 두 사제는 이번 여행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기대했다. 조선에 있는 페레올 주교와 미리 약속했기 때문에 지정된 장소에서 자신들을 태울 조선 신자들의 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최양업 신부의 마음가짐도 예년과 달랐다. 최 신부 표현에 따르면 1847년 프랑스 함대의 고군산도 난파로 1848년 한 해를 허송세월했기 때문이다. 최 신부는 다시는 자신의 소홀함으로 이런 시간 낭비가 없기를 마음먹었다. “아마도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는 너무나 소홀하였습니다.…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저의 주님이시여, 만일 제가 당신 분노의 원인이라면 저를 바닷속 깊이 던져 주시고, 당신 종들의 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본래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치욕을 당하며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당신의 작품입니다. 저는 당신 안에서라야 겨우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체하는 것뿐이랍니다. 오로지 저에 대한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제 안에서 저를 통하여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최양업 신부가 1849년 5월 12일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령도에 나타나지 않은 최양업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가 탄 프랑스 함선 선장은 영국인이 작성한 해도를 따라 백령도로 배를 몰았다. 아마도 1816년 영국 군함 알세스트(Alceste)호의 맥스웰(Maxwell) 함장과 리라(Lyra)호의 홀(Hall) 함장 일행이 작성한 해도였을 것이다. 5월의 서해는 그리 녹록지 않다. 계절풍이 바뀌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서해는 중국 산동과 요동 반도에 자주 형성되는 저기압과 막바지 겨울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돌풍을 동반한 너울을 만들기도 한다. 두 신부를 태운 배도 이 시기 변덕스러운 서해 날씨를 비켜갈 수 없었다. “계절이 꽤 나쁜 때였으므로 위험과 노고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사슬이 끊어지고, 닻은 잃어버렸으며, 선장은 함선 전체를 파선 당하게 할까 봐 조바심을 냈습니다. 무진장 애를 쓴 끝에 우리가 그토록 찾고 바라던 포구에 도착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두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포구에 도착한 후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전도’를 입수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영국 해도에 표시된 ‘교도’(Kiaotao-황해도 초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봄)였다. 최 신부는 배를 정박시킨 후 주민들에게 섬의 이름과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해도에 표기된 지명과 전혀 다른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신부는 다시 배를 돌려 해도에 ‘백령도’라고 적혀 있는 다른 섬으로 가봤으나 중국 배나 조선 배 그 어떤 배도 보지 못했다.

 

궁지에 빠졌다. 최 신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이요 지극히 위험한 곳이었다. 닻을 내릴 수도 없고 안내자를 부를 수도 없었다. 어떤 조선 사람이라도 외국인에게 심부름하기 위해 접촉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두 신부를 태운 배는 경황없이 허둥대는 동안 섬에서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뱃머리를 상해로 돌려 항해를 했다. “우리 선장은 라 피에르 함장이 당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당할까 봐 시시각각으로 조바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은 더 이상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성녀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온전히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섭리에 맡길 따름이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도 만나기로 한 장소에 두 신부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제가 정했던 백령도 근처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곳으로 보낸 배가 중국에서 온 배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대로 왔더라면 매우 좋은 기회였을 텐데요. 약속 장소로 오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페레올 주교가 1849년 11월 28일 한양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입국 실패보다 신자 안위 걱정

 

최양업 신부는 자신과 메스트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것보다 자기들을 데리러 온 신자들과 자신들로 인해 조선 교회가 화를 입었을까 봐 걱정했다. “이제 저는 다시 상해에서의 귀양살이로 되돌아와 있습니다. 아마 우리를 영접하러 오던 저 가련한 신자들이 포졸들의 손에 붙잡혔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의 포교지 전체가 또다시 박해자들의 참혹한 광란으로 마구 난폭하게 찢겨졌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심히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함선이 또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 신자들에게 크게 격분해 분풀이할는지도 모릅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겸손과 교우들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백령도 여행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가는 선상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난처한 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말한 산동 배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어선들에 관한 정보를 산동에서 두 번 물어보게 했는데, 그때마다 조선 해안으로 가는 배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배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길은 제게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5월 15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해에 도착한 두 신부는 그제야 여행 전 그토록 원했던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두 신부가 백령도 여행 전 이 지도를 갖고 떠났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가정이지만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았을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프랑스 함선과 조선 신자들이 서로 다른 지도를 가지고 만나기로 한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었다.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두 차례에 걸친 해상 입국 시도에 실패하고, 그로 인해 1847년부터 1849년까지 근 3년을 허비한 것을 고려해 다시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을 모색한다. 때마침 그해 겨울에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해 보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도 받았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다시 요동으로 향했다. 최양업 신부는 길을 떠나면서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거룩한 순명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저는 벌써 우리 선교지인 조선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저 세상에서 우리 신부님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저의 장상이 명하시는 것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같은 편지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