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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선미 시인 / 천남성을 만나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8.

주선미 시인 / 천남성을 만나다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 숲에서 만난

제 몸 가릴 땅 한 평 겨우 지닌 천남성

 

후박나무, 때죽나무, 으름덩굴에 가려져

비자나무 광합성 거들고 있다

 

독기 영글어 첫서리 넘어

겨우 꽃 피우는 그녀

키 큰 나무 유혹하듯 손길 뻗쳐 오면

곤혹스런 향기 터트려

맹독 품은 붉은 입술 보란 듯이 내민다

 

단 한 번 키스로 운명을 맡겼다

 

아무리 세월을 닦아도

낯선 울타리 제 그늘 거두지 않는 남자

 

밖으로 나가는 길 끊어 놓고는

새벽 찬 바람 걸치고 들어 온다

 

처마 그늘만 지키던 그 여자

빼앗긴 언어 되찾으러

온몸 가득 맹독 품은 채 일어선다

 

뜨겁게 타오를수록 차가워지는 가슴으로

막아서는 어둠 불사르고

차갑게 식은 독배 든 채 걸어가고 있다

 

시집 『통증의 발원』(시와문화, 2020) 수록

 

 


 

 

주선미 시인 / 채석강 암벽에 기대다

 

 

답답한 도시 밀어내고

툭 터진 바다 찾아가는 길

 

이태백이 뛰어들었다는 채석강 달빛

촘촘히 들어앉은 책갈피 사이로

빽빽하게 박혀있는 아픔이 검다

 

수평이 흘러내린 해식 절벽

중생대 백악기에 기대고

움푹움푹 패인 공룡 발자국 무성하다

 

층층이 쌓인 검은 바위 기억은

까마득한 시간으로 쌓이는데

 

거친 공룡 발바닥에 뭉개진

따개비들의 숭숭 뚫린 가슴

들어앉은 모래 알갱이들 수북하다

 

파도칠 때마다 벌어지는 너와의 간격

늑골에 촘촘히 박힌 아픔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절벽이 만든 억겁의 시간

프레임에 갇힌 지층에서 휘어져 내리고

제풀에 풀어진 오후의 하늘

 

차가워진 손바닥으로

불투명한 암벽 물방울 분분하다

 

무성하게 피어났다

 

시집 『플라스틱 여자』(시와문화, 2021) 수록

 

 


 

 

주선미 시인 / 낙지에게서 한 수 배우다

 

 

썰물 때가 되면

햇빛 반사되는 집 앞 갯벌은

언제나 눈부시다

 

엄마가 따온 굴 구워 먹는다고

가족들이 모여 안 마당이 들썩거렸다

돌을 쌓아 망을 걸고

붉은 다라이 가득 담긴 굴

장작불 붙인 곳으로 끌고 오는데

“낙지다”

누군가 소리쳤다

 

수북하게 담긴 굴 사이사이

숨어든 낙지 찾아

굴착기처럼 파헤쳤다

어디로 숨었는지 오리무중이다

 

굴 껍데기 속으로 숨었으니

버티면 얼마나 버틸까

알아서 기어 나올 테니

굴이나 구워 먹자고 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위

타닥타닥 벌어지고 있는 굴 껍데기들

뒷담화하느라 바쁜

가시 돋은 혀들로 보인다

 

시를 쓴다고 도착한 지점

날고 싶은 도시 한가운데였으나

매일 시작하는 행간은 고립의 연속

 

비집고 들어갈 자리 찾느라

헤집고 또 헤집었다

그럴수록 단단해지는 벽

뒤로 돌아갈 수 없고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아득했다

 

으르렁거리는 장작불과 가시 돋친 혀

연관성을 찾다가

굴 껍데기 속으로 묻어 들어간

낙지 몸통에 생각이 멈춰 섰다

 

시끌벅적한 소리도 잦아들고

다라이도 붉은 바닥이 드러났다

납작 엎드린 낙지 몸통이 보인다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떼어 내었다

아픔을 이겨낸 내공

바닥에 착착 새겨져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8월호 발표​

 

 


 

주선미 시인

충남 태안 출생. 2017년《시와 문화》신인상 등단. 시집 『안면도 가는 길』 『일몰, 와온 바다에서』 『통증의 발원』 『플라스틱 여자』가 있음. 《시와 문화》2019 젊은 시인상, 충남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현)《시와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