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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규환 시인 / 그림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8.

최규환 시인 / 그림자

 

 

그리운 자가 그림자로 생각될 때

꿈속에서도 그림자를 따라다닌 적 있다

그늘과 그림자를 깨달았을 때 빛이 보인다는 걸

운명처럼 뒤늦게 알게 해 준

그림자와 그리운 자 사이

내 한쪽은 그리운 자였고

너의 한쪽이 그림자가 되어 서로 마주 보았던 계절

 

그림자가 좋아

빛이 달아준 그림자를

빛보다 융숭한 맑음이라 여기며

내 그리움과 너의 그림자 사이에 부는 호젓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가 다시 나팔을 분다고 할 때

꿈에서도 그림자만 따라다니는 일몰 근처에

 

내 한쪽을 다른 한쪽에 안겨주지 못하더라도

그리운 자,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비혹한 배경

 

그림자가 좋아

 

-시집 『동백사설』(상상인, 2022) 수록

 

 


 

 

최규환 시인 /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행간 2

 

 

겨울 외투로 가려진 연약한 우리가

빛으로 보였던 건 습한 그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너의 주변을 밤에게 놓아주려 했던 얼룩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런 이상하고 괴팍한 설움이 남아 있다면

모든 좌표와

우리가 남겨야 할 이름은

어디에 표적을 달아줘야 할까

 

날마다 죽는다는 사람과

날마다 살아야겠다는 어린 소녀와

날마다 버틸 수밖에 없다는 아비와

한사코 울다가 진정에 접어든 산맥과

젊은 시인이 잠든 묘비의 기록과

리어커를 끄는 늙은 주름과

집으로 향하는 사륜구동의 바퀴와

회당에 퍼지는 발기된 메아리와

방에 남겨진 안타까운 부스러기들과

 

하늘 향해 뻗을 수 없는 포도나무는

빈 가지를 엮었고

봄꽃은 허망으로 피어난 새록이었다

 

나무가 죽은 마른 장작에서

불꽃은 처음부터 고목이 아니면 밝힐 수 없는 거였다

 

-시집 『동백사설』(상상인, 2022) 수록

 

 


 

 

최규환 시인 / 소등과 점등 사이

 

 

빛이 안으로 들어와 눈부시면

목숨의 곁가지야 아무렇지 않게 놓아주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 빛은 소멸이었는지

언제부터 씨앗이 죽은 것의 다른 이름이었는지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땐

아무렇지 않게 생활이 우스꽝스럽고

가끔 팔자에도 없는 호사를 누릴 때도

별것 없는 술객의 처량이 밝게 빛나는 것이다

 

눈을 감고 길을 걸었다

소멸되는 점등의 시간을 뒤로 하고

또 걷다 보면 별이 무덤처럼 보이면서

동공 안으로 들어온 빛의 입자는

고장 난 신호등처럼 까마득하였다

 

간판처럼 꺼진 길

골목을 배회하는 한 사람의 뒷목이 빛의 배후로 남아 있다

 

-시집 『동백사설』(상상인, 2022) 수록

 

 


 

 

최규환 시인 / 멀리 2

 

 

빈집에 당도한 바람이

헛기침 한 번 내뱉고 지나갈 때

새벽의 쓸쓸에 뒹구는 칼잠으로 와있는가

왼손이 하는 세상이라 오른손은 늘 같은 뼈마디에서 허물어졌는가

힘없고 누추한 오늘의 활자처럼

서툰 잠에 문밖을 나온 나처럼

유리창 안개가 서로를 나누는 뒤엉킴으로 왔던

그런, 지독한 생에게 던진 얇은 페이지 안에서

 

정해진 간극에서 바람은 차게 불고

몸소 치닫던 소리가 멈추던 날

너의 언덕에서나 혹은

내가 그 아래 놓여 부르짖음으로 오더라도

물 한 방울의 서늘함이 내 명치를 두드려 볼 때

 

서둘러 바람은 떠나는 것이리라

묵향 하나 남을 것 없이 모조리 남기지 않으리라

멀리

별의 자리를 옮긴다 해도

사람이 하는 사랑은 덧잎 하나씩 놓아주다가

불현듯 빛 하나 물고 사라진다는 걸

 

-시집 『동백사설』(상상인, 2022) 수록

 

 


 

 

최규환 시인 / 탐하다

 

 

거리에서 뒤엉켜 있었다

세계 속엔 비의가 순리적으로 나부꼈다

그늘로 살았지만 오히려 찬란했던 빛의 소란,

벅찬 시들이 살아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게 내 운명인가 싶을 때마다

깊은 공원에 앉아 눈먼 자의 눈으로

귀 먼 자의 소리로

모든 걸 탐하고 싶어진다

 

욕망이 기웃거리는 대로변

탐하는 자의 눈이 빛을 쏟아내듯

기물이 가까울수록

외진 밤 등불이 안으로 들어찰수록

기록적인 시를 탐하는 순간

초목도 불현듯 처음으로 와있었다

 

탐하여

숱한 어둠의 길을 걸어야

기록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집 『동백사설』(상상인, 2022) 수록

 

 


 

최규환 시인

1993년 《시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동백사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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