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안차애 시인 / 반성적 당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8.

안차애 시인 / 반성적 당근

 

 

오늘의 재료는 당근이예요

 

​멀리가려고 발돋움하는 당근이예요

​붉은 색을 반성하는 당근이예요

​구름을 비우는 하늘처럼

​다이어트가 필요한 당근이예요

 

​모직 주름스커트 5000원

​그린 스웨이드 쟈켓 20000원

​커피주전자 12000원

​김진명 추리소설 3권 3000원

 

​스커트를 쟈켓을 차주전자를 추리소설세트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당근

​얼굴을 내려놓으려고

​발자국을 짤랑거리는 당근

​번지는 맛이나 돌아서는 맛이 필요한 당근이예요

 

​당근 좀 깎아 주세요

​하품이 나온다면, 반값에 주세요

 

​당신의 근처가

​가장 어리둥절하다면 당근

당근이예요

 

​모자나 옷들이 당신을 찌푸린다면

​눈썹이나 웃음소리가 자꾸 당신을 떨어트린다면

​오늘은 일단, 당근이예요

 

계간 『한국동서문학』 2021년 겨울호 발표

 

 


 

 

안차애 시인 / 왼쪽 귀를 간지럽히는 빗소리처럼*

 

 

물방울의 망막에 맺힌 풍경이 건너온다

기억과 망원렌즈 사이의 온도일 수도 있다

 

​반은 가려져 있고

​나머지 반의 반절은 흔들리거나 흘러내리는

​여자와 택시와 길들

 

식어가는 중인가 미열이 오르는 중인가

건너가는 중인가 돌아오는 중인가

어렴풋이 돋아나는 중인가

희미하게 스러지는 중인가

 

빨강 우산이 공중에  창을 낸다

노란 택시가 틈과 그때의 방향을 몰아가고,

 

순환구조형식이어서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눈송이와 빗방울이 길을 묻지 않듯

점, 점, 점

휘날리는 목적지들

 

왼쪽 귀를 간지럽히는 빗소리처럼

내 안에서 떠도는, 창문 밖의

온도들

 

* 사진작가 사울 레이트의 다큐 중에서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2년 여름호 발표

 

 


 

 

안차애 시인 / 감각의 온도

-S에게

 

 

검은 말의 수위에 잠겨있었다

​납작 눌린 것이 기어이 뾰족해진다

 

​어둠에서 젖 냄새가 났다

​한 방향을 만지려고 나머지 방향을 무너뜨릴 때 같이,

감각되지 않는 감각이 무럭무럭 자라났

 

다엄마는 금기어였으므로

​안구의 뒤편이 대낮에도 자주 튀어나오고,

 

​감각 없는 발목을 드문드문 꽂고 다니면

​발열체도 없는,

이상한 온도가 떠다닌다

 

​검정을 그었는데

​순교자의 피처럼 하얀 생각들이 흘러나왔다

바탕색이 없어서 따뜻했다

 

엄마는 반대말이 없었으므로

막연하지 않은 말들이 자꾸 막연해졌다

키 대신 송곳니가 자라는 기분이었다

 

계간 『시와 문화』 2022년  봄호 발표

 

 


 

안차애 시인

1960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교육대학 졸업. 200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어교육 전공. 저서로는 시집으로 『불꽃나무 한 그루』 『치명적 그늘』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와 교육 도서 『시인 되는 11가지 놀이』  등이 있음. 2014년 세종우수도서 선정. 문예진흥기금, 문화재단기금 다수 수혜.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