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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식 시인 / 바다에서 시인에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8.

이영식 시인 / 바다에서 시인에게

 

 

파도가 바위를 친다

함묵의 북, 두드려 억만년 잠 깨우려 한다

저를 허물고 바람을 세우는 파도

낮고 낮아져 모음만으로 노래가 되는 시를 쓴다

 

시인이여

바다라는 큰 가락지 끼고 도는 푸른 별에서

그대, 시인이려거든

바다 건너는 나비의 가벼움으로 오라

비유로 말고 통째로 던져 오라

애인이자 어머니이며 삶이고 죽음인

바다를 사랑하라

근원에서 목표까지 온전히 품어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정신을 적시는 바다

모래톱에 밀려온 부유물들을 보라

모든 것 다 받아 준다고 바다가 아니다

마실수록 갈증이 되는 허명(虛名),

껍데기로 뛰어든 것들 잘근잘근 씹어 내뱉는

허허바다

 

오늘도 어느 해류는

목마른 편지가 든 유리병 하나를 실어 나르기 위해

입 꼭 다문 채 온밤을 흐른다

 

- 이영식 시집, 『휴』 중에서

 

 


 

 

이영식 시인 / 풀독

 

 

고향 집 뒤뜰 잡초를 뽑았을 뿐인데

팔뚝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개여뀌, 환삼덩굴이 별사(別辭)를 새겨 놓은 것일까

꾹, 꾹,

철필로 눌러쓴 절명의 문자들

며칠째 불침번 서며 내 잠을 쓸어 낸다

 

가만히 돌이켜 보니, 나는

저 풀포기를 잡고 일어난 적 있었다

무허가 판잣집

쑥대밭이 되고

개밥바라기도 쭈그러져 내동댕이쳐진 밤

독이 올라, 시퍼렇게 독이 올라

악다물고 있을 때

내 손 잡아 세워 주던 질경이 뿌리들

 

팔둑 위에 갈필로 긁고 일어선

저 날 선 복병(伏兵)들에게

오늘 밤 나는 전복(顚覆)될 것이다

선잠 들더라도 육십 년대 시궁쥐처럼

해방촌 산등성이 비린내 곁을 기웃거리겠지

 

끝내, 잡초를 벗지 못할 것이다

 

—이영식 시집 『휴』(천년의시작, 2012)

 

 


 

이영식 시인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공갈빵이 먹고 싶다〉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공갈빵이 먹고 싶다』(문학아카데미, 2002),『희망온도』(천년의시작, 2006),『휴』(천년의시작, 2012)가 있음.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및 문화관광부 우수도서 선정. 한국시문학상, 2012년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수상. 현재 초안산시발전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