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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우 시인 / 빙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9.

-제4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정현우 시인 / 빙점

 

 

나의 아홉 살은 얼음감옥,

쌀은 씻어도 묵은 냄새만 났다.

 

엄마, 사람에게도 겨울잠이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어는점을 알고 싶어요,

지루한 속도는 언제 떨어질까.

 

동그란 원을 그리듯 앉아

사람들의 머리냄새가,

삶이,

나를 지나칠 테니

세상의 경계가 희미해져요.*

 

어둠이 얼리면 발목은 없어진다.

나는 신을 뒤집어 신고

다정히 젖을 수 있다.

 

겨울이 울음을 걸어 잠근다.

수도꼭지는 돌아가지 않고,

처음부터 받아 놓은 것은

얼음, 나의 잘못,

 

고드름 속,

거꾸로 달린 천사들이 기어 나와

나의 발목을 깨트리는 밤.

 

별점을 치는 뱀들을

눌러 죽이는 밤.

 

점으로 떠돌다가

온전한 사람으로 점지되었을 때,

 

시간에 연명하는 넝쿨 같은 인간에게

천사들이

언 손에 입김을 불어 줄 때

 

슬픔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견디는

겹겹의 눈,

 

지붕 위, 눈이 쌓인다.

백색 무덤이 될 때까지

우리는

까마귀 떼와 시체놀이를 한다.

 

죽이고 싶은 목록을 지우고

나는 엎드려

잘못 태어난 것들을 떠올린다.

 

엄마, 새벽에는 밥 대신 슬픔을 안쳐주세요.

 

이미 와장창 부서졌는데도,

저 빛의 원뿔들.

 

* Hoppipolla 시규어로스1집.

 

 


 

 

정현우 시인 /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될 때 어둠 속에 손을 담그면 출렁이는 두 눈, 검은 오늘 아래 겨울이 가능해진 밤, 도로에 납작 엎드린 고양이 속에서, 적막을 뚫는 공간, 밤에서 밤을 기우는 무음, 나는 흐릅니다. 겨울 속에서 새들은 물빛의 열매를 물어 날아오르고, 작은 세계가 몰락하는 장면 속을 나는 흐릅니다. 풀잎이 떨어뜨리는 어둠의 매듭이 귀와 눈을 먹먹히 묶고, 돌과 층층이 쌓이는 낮과 밤으로부터 이야기하자면, 사라지기 위한 은유는 모두 내게 필요 없는 것, 죽음은 함께할 수 없는 것, 그러니 각자의 슬픔으로 고여 있는 웅덩이와 그림자일 뿐입니다. 묘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있다면, 바깥에 닿는 비문, 발소리를 듣는 동안, 괄호를 치는 묵음은 그들이 죽인 밤을 기록하는 서(恕), 그림자는 순간 쏟아지는 밤의 껍질, 우리를 눕히는 정적입니다. 흐르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의 죄와 형벌, 지우고 싶은 묘비명 같은 것이나 수렵은 시작되었고 검은 고요로 누워 흘러갈 뿐입니다. 간밤의 꿈을 모두 기억할 수 없듯이, 용서할 수 있는 것들도 다시 태어날 수없듯이, 용서되지 않는 것은 나의 저편을 듣는 신입니까, 잘못을 들키면 잘못이 되고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 용서할 수 없는 것들로 나는 흘러갑니다. 검은 물속에서, 검은 나무들에서 검은 얼굴을 하고, 일몰하는 곳으로 차들이 달려가는 밤, 나는 흐릅니까. 누운 것들은 흘러야 합니까.

 

 


 

정현우 시인

1986년 평택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창비, 2021)가 있음. 제4회 동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