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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시안 시인 / 도배의 정의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9.

하시안 시인 / 도배의 정의

 

 

사소한 기척도 들키던 방

당신이 떠나고 흔적을 벗겨내요

벽면에는 당신이 발라놓고 간

처음으로 가득 차 있어요

먼저 달력을 떼어내요

쓸모가 사라진 숫자가 먹먹해요

일 년은 너무 긴 공간인가요

낱낱이 눈빛을 지운 오늘 같은 어제들

어떤 동그라미는 무모하게 기억을 기념하려 하죠

액자 앞에서는  일 초간 멈칫해요

어색한 자세 앞에서도 이젠 웃을 수 있어요

옆은 흔하고 다정은 멀어서 정면을 볼 때

팔은 태도를 잊었을까요

함께여서 믿었던 완벽한 포즈

정지된 표정과 자세를 누가 먼저 풀었을까요

시계가 멈춘 이유가 배터리 탓이라고요

아니죠, 한쪽으로만 돌던 시간이 방전된 건

순전히 철거 때문일 거예요

엉덩이에 유적을 쌓던 책상도 모니터도 넋을 놓았어요

책장은 왜 한결같이 근엄한가요

다시 읽으려는 다짐이 버리려는 각오보다

힘센 이유를 책들은 말해주지 않아요

언제나 버리는 데는 결기가 필요하죠

감정도 한꺼번에 드러낼 수 있게 전집 같으면 좋겠어요

이별을 위한 부록도 필요 없게 말이에요

벽은 이 모든 걸 지켜본 방관자죠

어떻게 한결같이 모르는 척 벽만 될 수 있을까요

시멘트처럼 한번 굳어진 것들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나 봐요

벽은 스스로 균열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까

벽지는 가장 완벽한 위장술인 거죠

자, 이젠 전부 뜯어내 볼까요

 

월간 『모던포엠』2022년 7월호 발표

 

 


 

하시안 시인

1964년 경남 남해 출생. 2012년《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2020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 동시집 『사과나무 심부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