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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호 시인 / 바깥으로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9.

김광호 시인 / 바깥으로서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너무 작은 원을 그립니다. 너무하다는 말을 잊으면서 그것이 완벽한 원이라고 믿으면서 너무 작은 원만을 그립니다. 구심점 없는 원을 무한히 그리면 무한한 각을 가진 다각형의 원이 생겨납니다. 하얀 종이에 구멍이 생깁니다.

 

나는 이제부터 그것을 하나의 눈동자라 부르겠습니다.

 

하나의 눈동자로 하나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둘 중 하나가 하나의 눈동자로 빠져들 때 하나의 눈동자 속에 빠진 하나의 눈동자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눈동자가 있던 빈자리. 눈동자가 빈 일그러진 얼굴. 너는 사라진 눈동자를 위해 다시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나의 눈동자가 없는 초점으로 그린 원은 작은 종이에서 벗어나고. 바깥으로 그려지는 원. 무한 다각형보다 무한한 다각형이 바깥에 그려지고. 너는 왜 두 개의 눈동자를 가져야 했나. 눈동자가 바깥에서 생겨나고 벽의 무늬가 된다. 내가 벽에 붙인 그림으로서. 크레파스를 손에 쥘 수 없는 바깥으로서. 바라보았던 것은 자신이 잠근 문을 열지 못해 열쇠 구멍에 눈동자를 바친 바깥의 사람.

 

들어올 수 없는 바깥의 사람은 바깥을 배회해야 하고

 

중심을 향해 걸어가려던 모양은

 

밤의 둘레길을 걷다 온 모양이고

 

신발의 닳아버린 부분은 언제나 바깥이고

 

무너진 문으로 걸어들어 온 방에서

 

아이는 잠이 들고 말았어요.

 

그릴 것이 너무 많은데. 음. 음.

 

계간 『다층』 2022년 여름호 발표

 

 


 

 

김광호 시인 / 경청의 소라

 

 

 불면증을 앓는 너가 불면에서 깨어나 불쑥 꿈 얘기를 시작할 때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걷고 있었어

 

 너의 이름을 부르면 너는 파도가 사라진 자리에서 소라처럼 나타나. 너를 하나도 닮지 않은 소라를 나는 왜 너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넓은 해변에 덩그러니 나타난 소라를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아껴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소라가 아니라 너의 귀야. 어디를 다녀왔길래 눈과 코와 입술이 다 사라지고 얼굴엔 귀 한 짝만 남았니. 입술이 없는 너는 아무 말도 없이 귀만 쫑긋거리고 있어. 너의 귀에 내 귀를 갖다 대어 봐. 신기해. 녹음된 바다의 목소리가 들려. 입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관계를 떠올려. 물속에서 소라가 소라를 애무하는 장면을 언젠가 상상한 적이 있어. 너에게 말할 수 없는 말을 많이 떠올릴수록 나는 입술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껴. 입술이 사라질수록 더 깊고 더 신비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이제 그만 들어도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귀만 남아있는 얼굴이 되어서 파도가 사라진 자리에 놓여있어. 다시 파도가 밀려왔을 때

 

 꿈에서 깼어

 

 아무 말도 없이 너의 꿈 얘기를 듣다가 아침 먹자 우리

 

 늦은 아침을 짓고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가 없는 식사를 하는데

 나는 모래를 씹어

 

 모래를 뱉고 싶은데 모래를 뱉을 입술이 사라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나를 너는 생경하게 바라보고

 

 나를 줍는다

 

 차가운 귀에 차가운 귀를 대어보면

 따듯하다 이 말이 녹음된 소리처럼 재생되었다

 

계간 『다층』 2022년 여름호 발표

 

 


 

김광호(金光鎬) 시인

1984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 경인교육대학교 졸업.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받음. 202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현재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 초등학교 교사, 글발시인축구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