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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수우 시인 / 모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9.

김수우 시인 / 모과

 

 

소명이다 충분히 썩어가는 것

최선으로 향기롭다가 최선으로 깜깜해지는

 

모과 속에서 신이 썩어간다

그 신은 아브라함이 초대한 사막나그네 중 한 사람

 

하루 걸러 한 번 허공의 무게를 측량하던

추락으로 목숨을 증명하던

검붉은 반점 위로 곰팡이를 피우는

오래 전에 꿈꾸었던 배반을 완성하는

 

모과의 뼈는 향기였다

삼켰던 구름송이와 천둥과 가을별자리를 게워낸다

행운이라면 창가에서 태종대 앞 주전자섬을 바라보는 일

물노을에서 지리산 산골을 건져내는 일

 

이유가 없는 것들이 살던 성전은 암흑이 되어 쪼그라든다

향기는 오래된 쐐기

중력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어

먼지의 한 미립자가 마침내 하나의 우주로 변환하면

 

울툭불툭한 이치들은 빙하조각이 된다

녹고 녹고 바다를 떠돌다 흰 물거품이 되었던 신은

충분히 썩어가는 일이 생의 전부임을 안다

캄캄하여라 환하여라 무시무시한 사랑

 

봄구름을 쌓고 있는 위대한 거부,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본 신만이 알고 있는

성실한 침묵

 

계간 『신생』 2022년 봄호 발표

 

 


 

 

김수우 시인 / 청동거울

 

 

 바다였다 오솔길이었다 아니 오래 갈아낸 어둠이었다

 물이 끓고 새가 울고 찔레순이 돋고

 박물관 청동거울 속에서 움푹움푹한 저 발자국들

 

 모든 애인들이 죽었지만

 어디선가 다시 태어나 다시 죽었지만

 언젠가 또 태어나 또 죽을 것이지만

 사랑은 표면이 없는 영원을 지나 과거로 돌아가는 중

 희미하게 선명해지는 뜬눈들

 

 푸른 쟁기질 따라, 그 맹세 같은 노동을 따라

 잊어버린 별자리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삶은 언제나 영매의 탁자였고 허물들로 가득했다

 빗방울들, 빗방울 같은 연못들, 연못 같은 사람들, 사람 같은 쐐기풀들, 쐐기풀 같은 애벌레들, 애벌레 같은 먼지 뭉치들, 폐간된 잡지들, 다리 부러진 의자들, 불가사리들,

 접신하는 순간

 제 허물을 벗은 파충류처럼 탈각한 갑각류처럼 울툭불툭 일어나는 새로운 힘줄

 추출된 심령체는 버팔로 심장처럼 붉은데

 거울 속에서 내가 사랑했던 무덤들이 목화꽃처럼 피어난다

 툭 툭 부러진 거짓말들이 마르고 있다

 

 모든 꿈은 원래 유목이었으니 바람이었으니

 지친 눈꺼풀도 물멀미 심한 침묵도 청동 속으로 걸어간다

 완료되지 못한 시간은 확실한 미래

 손 한번 잡지 못한 애인들은 더 선명한 미래

 

 애초 우주는 한 장 청동거울이었다

 

반년간『서정과 현실』 2022년 상반기호 발표

 

 


 

김수우 시인

1959년 부산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번역시집 『호세 마르티 시선집』 그리고 비평집 『호세 마르티 평전』, 산문집 『쿠바, 춤추는 악어』 『호세 마르티 평전』외 십여 권 상재. 부산작가상 수상, 최계락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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