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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옥 시인 / 지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9.

김은옥 시인 / 지구

 

 

손바닥에 지구를 올려놓고 보는 세상이야

여기에 안과 밖의 구별이 있을까

파랑은 바다고 오색찬란한 무늬는 육지라고

그렇다고 지구를 함부로 굴려서 망가뜨리지는 마

고통의 뿌리는 뼈를 뚫고 골수에까지 뻗어갈 거라고

 

 


 

 

김은옥 시인 / 사철나무가 흔들린다

 

 

한 생애가 살갗을 스친다

사철나무 하나 흔들흔들

다른 나무는 조금 흔들

멀리 있는 나무는 살짝 흔들

흔들리지 않는 나무들도 있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에도

바람의 마음이 통하는 것과 통하지 않는 것이 있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바람의 생애를 읽는 사람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오시리라는 기대에

미리부터 움찔 떠는 놈도 있다

돌멩이가 날아온다

큰 걸음으로 피하고 바라보니 날아가는 참새였다

참새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까

참새는 미래를 모르고

나 또한 돌멩이를 모른다

바람이 분다

아까 그 바람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기로 다 같이 결의한 국군의장대 같다

바람의 생애를 읽으려는데

또 다른 바람이 오신다

바람의 심장에 손을 얹는다

수많은 생애가 내 안에서 함께 흔들린다

 

 


 

 

김은옥 시인 / 촉 좋은 마당

 

 

새벽이 신발 속에 발을 쑥 집어넣자마자

강아지도 신발 신고 따라 나온다

전선이나 나뭇가지가 품은 달의 공전이

자전의 그림자들이 그 목젖을 드러내는 중이다

 

꼬리 아홉 달린 붉은 죄목으로

꽃봉오리 속에 유배당했던 향기가 풀려난다

향기의 기포들이 기쁨의 등을 켜고

투명한 날개로 퍼져 날아간다

선잠 깬 잎사귀들이 기지개를 켤 때

풀숲 사이로 멀어지는 새벽의 신발이 살짝 보인다

귀 바짝 세운 풀 비린내들 곁에서

풀 강아지도 솜털 일으키며 짖기 시작한다

 

오늘도 깨끗한 촉으로 닦은 은수저에 이슬 받아서

아침이 배를 채울 것이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아홉 개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공중제비를 도는 마당

 

 


 

김은옥 시인

2015년《시와 문화》 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의. 우리시. 시산맥특별회원. 현대시학회. 청미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