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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인하 시인 / 팔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9.

박인하 시인 / 팔월

 

 

지금은 칠월 한여름

아직 오지 않은 팔월에 대해서 쓴다

아이스크림처럼 빨리 녹는 시계는

지루해진 시간을 모래 위에 슬쩍 흘리고 있을 것이다

태풍은 바람의 틈새를 어슬렁거리다가

푸른 나무의 목을 쳐내고 제 수위를 견디지 못한 집들도

빙하처럼 물 위를 떠다니고 있겠지

뜨거운 태양 아래 칸나가 더 붉어지면

해바라기가 까맣게 속을 태우는 어떤 시절들의

그곳

 

이곳

생의 다른 온도를 지니고

고개를 내밀어 서로를 마중하는 시간들

형식이 완성되지 못한 편지는

고서처럼 바래가며 신비로워진다

우리는 아무런 소식도 주고받지 못하며

어떤 기억들로 예감을 만들며 그곳으로 이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장마가 지나가고 있으니

그곳의 해질녘은 조금씩 서늘해지고 있겠다

이곳의 뜨거움이 그곳의 바람을 가까스로 만나는

궁창에서 태풍이 시작된다면

너는 이미 가버리고 없는 팔월이다

 

 


 

 

박인하 시인 / 테를지, 프로메테우스

 

 

 아직 살아있구나 늦지 않았어 너덜거리는 자루 가득 장작을 메고 오가는 밤의 노역은 불을 지키는 시간 바람에 넘어진 것들 차곡차곡 주워다가 추운 밤 부려 놓으면 뜨겁게 솟아오르는 불의 제전 나는 불을 지키는 자, 치장 없이 허름한 옷가지로 성별을 감추었기에 누구도 쉽게 나를 호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름 없이 늙어가는 노파 불을 살피느라 언 몸을 녹일 수 없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내고 문 밖으로 나서면 얼굴을 찢는 바람 뿐 어떤 날은 별도 뜨지 않아 캄캄한 숲을 비틀거리며 걷는다 뜨겁고 차가운 것이 이생의 일이지 잘도 자는구나 장작이 타는 소리 꿈속에서도 들리는지 재가 되어가는 소리다 담요를 걷어차고 잠든 걸 보니 오늘도 나의 불길은 뜨거웠구나

 

계간문예 『다층』(2018년 겨울호, 젊은 시인 7인선)

 

 


 

박인하 시인

1969년 광주에서 출생. 2018년 여름호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서정시학회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