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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상희 시인 / 바느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9.

이상희 시인 / 바느질

 

 

남루를 기우려고

그는 실을 바늘에 꿴다.

그가 타고 앉은 섬이

기우뚱 몸서리를 쳤다.

바늘 귀에 들어간 그의 눈이

귀를 막는다.

그는 귀가 멀었다.

바늘 귀는 낙타 눈만큼 열렸다.

五官으로 꼬인 실이

거짓말처럼 꿰인다.

매듭을 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

바느질뿐일까.

그는 홈질이 마음에 들었다.

말줄임표같이 점점점점

그러면 쓸데없이 열린 것들이 닫혔다.

때로 한눈을 파는 마음이

손목을 봉하고

그가 앉은 섬에는

낙타가 바늘 속으로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시집 : 『잘가라 내청춘』, 민음사, 1989년

 

 


 

 

이상희 시인 /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세상을 빠져나가려는 중이야.

쉬잇 내 말을 들어봐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도 찾을 수 없도록

도와줘 데이지, 내 얼굴을 먹어줘

내 의자와 찻잔을, 이름과

구두를 삼키고 동그란 꽃봉오리를

단단히 오므려버려 숱한 풀꽃더미

사이로 숨어버려 새 주소에도

검은 새떼가 그림자를 떨어뜨렸어

포크레인이 앞산을 퍼먹으며

뿌리 없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창문을

열면, 녹슨 모래언덕이 무너질 듯

데이지, 그런데 난 돌아오고

싶을 거야 야수와 포응할 미녀를 기다리며

끝없이 기나긴 불안의 끄나풀이 되고 말거야

도와줘 데이지, 돌아올 수 없도록

내 생의 사진들을 먹어줘.

 

-시집 『잘가라 내 청춘』 中에서. 민음사, 1989년.

 

 


 

이상희 시인

1960년에 부산에서 출생. 부산여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7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시 <봉함 엽서>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벼락무늬』(민음사, 1998)와 『잘 가라 내 청춘』』(민음사, 2007)이 있음. 문예지 기자, 방송작가, 출판사 편집자를 역임. 현재 시 창작과 그림책, 동화 창작 및 번역 작업 활동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