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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유정 시인 / 뚝배기 같은 사람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30.

이유정 시인 / 뚝배기 같은 사람

 

 

찬장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투박한 뚝배기를 꺼내 보았네

바닥 테두리를 따라 명주실 같은 띠를 두른

곰팡이 자국을 보았네

 

물기도 없는 황량한 땅에 서식한

곰팡이의 근원은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했네

삶과 죽음이 어찌 가늘게 이어지는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네

 

한때는 펄펄 제 몸 달구어

고등어찜도, 된장찌개도 진하게 끓여냈건만

어느 날 내게로 온 초라한 유물 한 점

 

우거지도 담북장도

뚝배기에 담겨야 제맛 나는 줄 알지만

더디 끓어서 찾지 않는 뚝배기를

더디 식는다고 좋아했던 아버지

 

가진 것 없어도 서두름 없이

좁은 골목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왔던

반백의 사내를 추억하는 것은

뚝배기 하나뿐이었네

 

뚝배기에 담긴 뽀얀 사골국을 마시고

홀가분하게 일어서는 아버지

문득, 날아가 버린 날들이 그리워지네

뚝배기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네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

 

 


 

 

이유정 시인 / 저물지 않는 모성

 

 

가로등 불빛이 지워진 어둠 한 귀퉁이

커다란 비닐봉지를 움켜쥐고

중력에 저항하며 걸어오는 여자

 

바닥으로 끌려가는 무게에 눌려

한쪽 어깨는 능선처럼 기울었다

가쁜 호흡을 몰고 오는 발걸음이

태산이라도 끌고 오는 듯하다

 

어쩌면 전생의 그녀였을지 모를

자식들을 향한 욕망이

이제 손주들 앞에서 멈춰 섰다

 

종일 비좁은 재래시장 인파에 쓸려 다녔을 몸

천근 무게를 견뎌냈을 뼈마디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주름진 골짜기를 빠져나온 기억들이

시든 꽃잎처럼 흩어져 버려도

더욱더 조밀하게 자라나는 모성

죽어서도 명치끝에 걸릴 지독한 본능만 남았다

 

돌탑을 쌓은 시간만큼 버텨온 그녀가

연골처럼 닳아가고 있다

바람만 스쳐도 휘청거리는 생

목숨보다 간절한 그 무엇이 있어

아직도 수척한 샛길을 걷는 것일까?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

 

 


 

 

이유정 시인 / 사랑은

 

 

사랑은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다 가슴 울리는 북이 되기도 하고

짠하게 우는 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보고 싶은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러다 실비에 젖어 보기도 하고

한 점 바람에 흔들려 보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난꽃처럼 귀히 피는 것이 아니라

들에 핀 풀꽃처럼 작고 흔하게 피는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바라보고 느낄 수 있도록

 

사랑은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반쯤 비우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람이 불고,꽃잎이 지고,

눈이 오고,다시 꽃이 필 때까지

 

아, 사랑은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아플 때

눈물 흘릴 때

너를 향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다

너와 함께 짙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

 

 


 

 

이유정 시인 / 하나의 잔 속에

 

 

새벽이 오기 전 막막함을 걷어내고자

어둠 언저리에 낮은 등을 걸었다

보르도 잔을 앞에 두고

적포도주 같은 시간이 흘렀고

절망 어린 눈은

룸바를 추는 듯한 열대어를 엿보고 있었다

수족관은 바다를 담은 커다란 잔이었다

제 새끼를 집어삼키는 광기가 있었고

물너울 치는 갈등이 있었고

수초에 낀 주검도 있었다

채울 수 없거나 넘쳐버린 것들이

하나둘 잔에 투영됐다

작다고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삶은 허기진 잔에 부족한 값을 채울 뿐이었다

담지 못한 일상은 실뿌리처럼 엉켜 왔고

나는 가끔 타이레놀을 삼켰다

편두통을 잊으려 접었던 종이학들이 달빛을 받자

날아갈 듯 환한 날개를 털고 있었다

작지만 잘 닦인 잔에 담고 싶었던

신비한 학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미네르바, 2020) 수록

 

 


 

 

이유정 시인 / 굿바이, 사르트르

 

 

밤새 위와 장을 씻어내고 검진을 받았지요

바람 소리에도 삐걱대는 몸이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다면,또 걸어가겠지요

어둠의 눈초리가 막막한 시간

며칠 죽으로 허기를 달래던 위가

가락국수 한 그릇을 사달라고 하데요

된바람을 뼛속까지 맞으면서

낡은 가죽 신발 같은 재래시장을 찾았지요

따끈한 어묵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막혔던 숨골이 확 트이는 것 같았어요

죽 대신 면발 감아 빈속을 채웠지요

세월의 단근질에 질겨진 길목을 빠져나와

시공을 거슬러 드 플로르 카페로

사르트르,나는 당신을 찾아가요

 

낯선 하늘에선 달빛 한 줌 새어 나오지 않지만

노천 테라스 불빛은 맥주잔 속으로 쏟아지네요

당신 입술에 부드러운 거품이 달라붙기만 하여도

내 몸이 으스러지고 뜨거운 피가 표류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머지않아 몸속 피가 찐득해지고

온기가 사라질까 두려워요

허락한 적 없는데,이 몸 어둠이 고인 자리에는

몹쓸 것이 자라고 있던걸요

오래된 수도원 종탑 십자가엔 내 기도가 매달렸는데

사르트르,진정 당신은 신을 만난 적 없나요?

상처 입은 몸으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아요

운명을 벗어 버리고 팔과 다리를 펄럭이며

생제르맹 거리를 날고 싶어요

사르트르,당신은 글을 쓰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나요

남을 날들을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살아낼 거예요

두텁고 무거운 밤을 견뎌 내려고 씨앗만 한 희망을 물고

이제 현실로 날아와 앉습니다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미네르바,2020) 수록

 

 


 

 

이유정 시인 / 물고기자리 남자

 

 

대추나무 가지 사이로 별이 떨어지는

그 남자의 우물엔

푸른 물이 고여 있다

그곳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 파닥거릴 때마다

푸른 종소리가 났다

푸른 종소리를 주워 담느라

풀기 닳아 해진 옷 같은 그 남자의 내력은

푸른 이끼 낀 돌덩이였다

찬 기운이 우물 가득 번지던 날

지느러미 찢겨 나간 푸르죽죽한 물고기는

물풀처럼 떠올랐다

묵상일까

깊은 우물 속 푸른 속울음

몽땅 길어 올리던 그 남자

이제는 저수지에 낚싯대 하나 드리운 채

돌부처가 되곤 한다

 

-2017년《미네르바》 신인상 당선시

 

 


 

 

이유정 시인 / 포장마차

 

 

나 일생을 기다렸네

수상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낯설지 않았네

조붓한 길을 걸어온 그대가

이곳은 방황의 회기역이네

고단했던 그대가 둔탁한 걸음을 멈추고

대합실 안을 기웃거리며

벗어날 수 없는 인연발 같은 국수로

허기를 채우는 곳

뻘건 화로 위 먹장어 닮은 그대는

속살 우려낸 홍합 같은 정을 떼고

가끔은 사무치게 외로웠으려나

바람 드는 창이 따스할 때가 있지

허름한 곳에 때로는 불송이가 피지

중얼대던 술잔은 제멋대로 기울고

그대 마른 손이 멍든 미련을 뚝 떨어뜨려도

나 모른 척하네

외주름만 접네

 

-2017년《미네르바》 신인상 당선시

 

 


 

 

이유정 시인 / 하나의 잔 속에

 

 

새벽이 오기 전 막막함을 걷어내고자

어둠 언저리에 낮은 등을 걸었다

보르도 잔을 앞에 두고

적포도주 같은 시간이 흘렀고

절망 어린 눈은

룸바를 추는 듯한 열대어를 엿보고 있었다

수족관은 바다를 담은 커다란 잔이었다

제 새끼를 집어삼키는 광기가 있었고

물너울 치는 갈등이 있었고

수초에 낀 주검도 있었다

채울 수 없거나 넘쳐버린 것들이

하나둘 잔에 투영됐다

작다고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삶은 허기진 잔에 부족한 값을 채울 뿐이었다

담지 못한 일상은 실뿌리처럼 엉켜 왔고

나는 가끔 타이레놀을 삼켰다

편두통을 잊으려 접었던 종이학들이 달빛을 받자

날아갈 듯 환한 날개를 털고 있었다

작지만 잘 닦인 잔에 담고 싶었던

신비한 학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

-2017년《미네르바》 신인상 당선시

 

 


 

이유정 시인

2017년《미네르바》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 동시집 『사라진 물고기』 등이 있음. 제4회 전영택문학상, 제8회 전국계간문예지우수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