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몽구 시인 / 한밤의 다이얼
숭숭 뚫린 대화방 벽 틈에 숨어 엿듣던 음란서생들도 잠들었나 사위가 기름에 축인 듯 고즈넉한 밤 내 나이보다 늙은 제니스 라디오를 듣는다 볼륨을 올리자마자 모래알을 삼킨 듯 사각거리는 소리가 쏟아지지만 거슬리기는커녕 왠지 방안이 따스해진다 어긋난 치열이 부딪친 듯 쉬고 서걱거리는 베시 스미스*의 목소리가 상처투성이 라디오에 딱 어울린다 카네기홀 아닌 뒷골목 밤무대라도 영혼의 불꽃은 더 치열하다고 말해 준다
왠지 낡은 스피커 뒤에서 눈물을 삼킨 베시 스미스가 달려 나올 것 같아 뒷덮개를 가까스로 열어보면 사랑을 배신당한 흑인 여가수 보이지 않고 낡은 진공관들에 걸쳐져 있는 거미줄 위에 수명 끊긴 말들 즐비하다 한번 바르기만 하면 주름살 활짝 펴져요 수입 화장품 모델의 달콤한 말 표를 찍어주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드립니다 선거 때마다 반짝 떠돌다 이내 유령처럼 사라지는 여의도의 공약들 묵은 먼지 흐북히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 밤에는 부푼 오줌보를 참으며 늙은 라디오 앞에서 떠나지 못한다 어두운 거리를 등진 채 화려한 말잔치로 밤을 낮같이 밝힌 디지털 종편 방송이 삼켜버린 잡음들을 찾아 다이얼을 천천히 돌린다 슬그머니 밤무대 뒤로 가 눈이 큰 흑인 재즈 가수가 슬픈 블루스 행간에 눌러둔 말들을 찾아 사각거리는 볼륨을 올린다
*베시 스미스(Beessie Smith): 블루스의 여제라 불리는 미국의 흑인 재즈 가수.
박몽구 시인 / 청해호반에서
해발 3천미터 메마른 산들 사이에 맑은 눈 뜨고 있는 청해호에서 맞는 여름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별가족을 본다 20년 만에 갖는 북두칠성과의 해후 마음의 눈을 맑혀주는 것은 버려도 버려도 넘쳐나는 물질이 아니라 신이 내린 유리창을 깨끗하게 닦는 일이다 토끼풀의 가는 허리마저 덮으며 밤새 불어 젖히는 모래바람 지상에 쌓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으냐고 묻는 티벳 고원의 밤하늘 아래서 서울에 삼켜지면서 잃어버린 꿈을 헨다 오늘 살아갈 양식이 바닥을 드러낸 때 이리떼로부터 목숨같이 지켜온 어린 양을 하늘로 보내는 유목민 마을에 뜬 별이 유난히 곱다 사람이 만든 길을 벗어나 청해호에 잠긴 별을 한 줌 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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