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민 시인 / 얼굴
순식간에 눈가의 주름이 사라지는 걸 본다 입 꼬리가 받쳐 든 골 깊은 두 개의 능선이 사라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벽은 완강하지만 말은 살아 있다 수천수만 번의 찡그림으로 완성된 굴곡들
눈매가 깊어질수록 눈과 눈썹은 가까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져간다
긴 정적을 남기며 바이탈 사인이 멈춘다 의사는 그가 남긴 단말마의 시간을 기록한다
주름이 사라지자 얼굴에 고여 있던 말들이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다
간호사가 그의 입속에 틀니를 끼운다 말들이 흘러내리는 그의 마지막 얼굴에 하얀 끈을 동여맨다
턱 끝에서 나비리본 하나가 만들어진다
얼굴 하나가 완성되려면 얼마나 많은 침묵을 견뎌야 할까
외로운 사람은, 또한 신비롭다*
* 고트프리트 벤, 「외로운 사람은」에서
휘민 시인 / 칼의 춤
싸락눈 위에 시래기 국밥 흩어진다 대문 밖에 칼자루 두 개 던져진다
자정의 어둠을 뚫고 날아오른 두 개의 칼날 공중제비하며 겨울의 심장을 찌른다
칼끝은 번번이 안방을 가리킨다
어머니 일어선다 다시 칼날을 던진다
아버지는 며칠째 까닭 모를 신열에 시달리고 어머니는 마른입에 재갈을 물고 온몸으로 운다
칼끝이 대문 밖으로 향한다
마침내, 지신이 응답했다
마당가에서 매운 냄새가 났다 내가 마른 고추 반 자루를 태운 뒤였다
휘민 시인 / 달과 모딜리아니
밤에 공중전화를 들여다본다 가슴속 납작해진 고독을 밀어 넣으면 삼 분쯤 달의 음성 들을 수 있을까 목이 긴 여자의 슬픔 만질 수 있을까
나는 금요일 밤이 되면 살냄새를 찾아 나서지 집으로 돌아올 땐 괜스레 킁킁거리며 소매부리에 묻혀 온 화독내를 인중 밑에 숨기지
잔느, 어둠 속에서만 살아 있는 너 소유할 수 없는 심장의 고동 나의 오늘은 너의 불행을 미농지 위에 필사한 것 속이 보이지 않는 너는
바람이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서네 안주머니를 뒤적여 구름 한 줌 밀어 넣네 밤의 입술을 꾹꾹 눌러 달에게 전화를 거네 달이 길고 하얀 손가락을 뻗어 바람의 등허리를 쓰다듬네
바람이 지나가고 나는 재빨리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서네 수화기를 들고 다급히 재발신 버튼을 누르네
앞을 향해 나아갈 땐 그림자를 볼 수 없었어 내 앞에 목이 긴 어둠 깔리기 시작했을 땐 빛의 정수리를 지나온 뒤였지 나는 밤이 너무 무거워 누가 이 챙 넓은 모자를 벗겨 주면 좋겠어 내 눈동자에 고인 어둠을 거둬 가면 좋겠어
잔느, 먼 곳을 헤매는 나의 몸 너는 보이지 않을 때만 내게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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