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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인 시인 / 청혼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4.

김경인 시인 / 청혼

 

 

  차갑게 식은 태양은 꺼요

  잠들지 않는 야광 해바라기를 붙여 놓을게요

  유리창에 침을 뱉지 말아요

  들러붙은 풍경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잠의 출구에는 못을 칩시다

  입구에는 순하고 깨끗한 표정을 벗어

  모양 좋게 걸어 둘 하얀 문 하나를 달고요

  노란 진물을 내뿜는 기차를 타고

  우리 끄덕끄덕 흔들릴까요

  허공을 앉힌 의자처럼요

  아껴둔 말을 적은 공책을 찢어 새처럼 날려 볼까요

  그러다 죽은 새로 곤두박질치는 서로의 혼잣말을

  첫눈처럼 꼭 쥐어 볼까요, 아니 거센 눈보라처럼

  혀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내릴까요 그러다가

  혀에 스미는 눈송이처럼 지워질까요

  오늘 우리 귀엣말처럼 사소해집시다

  추운 세계에서 날아가려다 붙잡힌

  고통의 깃털을 산 채로 뽑아 만든

  가볍고 포근한 이불 아래서

  이웃의 나쁜 소식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잠의 입구를 서성이다가

  문득 흘러나온 혼잣말이 침대를 적실 때에

  서로의 창문에서 코끼리 귀를 닮은 커튼으로 펄럭입시다

  녹을 줄 모르는 얼음 위에서

  하나의 다리로 밤을 새는 거위처럼

 

계간 『시와 시학』 2022년 봄호 발표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와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가 있음. 2011년 제1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