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인 시인 / 청혼
차갑게 식은 태양은 꺼요 잠들지 않는 야광 해바라기를 붙여 놓을게요 유리창에 침을 뱉지 말아요 들러붙은 풍경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잠의 출구에는 못을 칩시다 입구에는 순하고 깨끗한 표정을 벗어 모양 좋게 걸어 둘 하얀 문 하나를 달고요 노란 진물을 내뿜는 기차를 타고 우리 끄덕끄덕 흔들릴까요 허공을 앉힌 의자처럼요 아껴둔 말을 적은 공책을 찢어 새처럼 날려 볼까요 그러다 죽은 새로 곤두박질치는 서로의 혼잣말을 첫눈처럼 꼭 쥐어 볼까요, 아니 거센 눈보라처럼 혀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내릴까요 그러다가 혀에 스미는 눈송이처럼 지워질까요 오늘 우리 귀엣말처럼 사소해집시다 추운 세계에서 날아가려다 붙잡힌 고통의 깃털을 산 채로 뽑아 만든 가볍고 포근한 이불 아래서 이웃의 나쁜 소식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잠의 입구를 서성이다가 문득 흘러나온 혼잣말이 침대를 적실 때에 서로의 창문에서 코끼리 귀를 닮은 커튼으로 펄럭입시다 녹을 줄 모르는 얼음 위에서 하나의 다리로 밤을 새는 거위처럼
계간 『시와 시학』 2022년 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과니 시인 / 대나무 영토 외 1편 (0) | 2023.02.04 |
---|---|
휘민 시인 / 얼굴 외 2편 (0) | 2023.02.04 |
남재만 시인 / 바위 외 1편 (0) | 2023.02.04 |
김종철 시인 / 칫솔질을 하며 외 2편 (0) | 2023.02.04 |
이선희 시인 / 바퀴 달린 가죽가방 외 9편 (0) | 2023.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