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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주 시인 / 시간의 얼굴을 보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5.

이은주 시인 / 시간의 얼굴을 보면

 

 

 1과 2사이에 촘촘한 구멍이 있어 잘디잘게 부서진 검은 빛이 울컥거리며 새어나오지 3과 4는 빛을 움켜잡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지 아주 가끔씩 여지를 주는 듯해 그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을 알면서도 구멍 너머를 넘볼 수밖에 없어 3과 4로 턱없이 부족해 5와 6을 깨워야 한다는 것을 알지 아니 안다는 게 아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7과 8은 계약이므로 의무적이지 8까지 흘러왔다고 해서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며 자위에 다름 아냐 9와 10까지 애를 써야 해 눈을 감아선 안 돼 11까지를 걸고 12를 낚아채야 해 그래서 미끄러질 때까지 질퍽해져 보는거야

 

 12 너머 그 어디쯤, 13이어도 괜찮을 구멍과 열쇠, 그 다른 이름이어도, 그 이름을 찾을 때까지, 다시 1과 2 사이의 검은 빛 안으로 돌진할거야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 2022.08.30. -

 

 


 

 

이은주 시인 / 나란히 걸으며

 

 

숲의 경계,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나란히 걸으며 나뭇결의 냄새를 읽는다 남자는 나무와 흙의 내력을 맡고 여자는 은유와 상징의 여정을 걸으며 바람이 흐르는 것을 본다 바람 속에는 커피가 끓고 빵익는 냄새가 난다 커피는 말꽃으로 피어 환하게 끓어 넘치고 빵은 구름꽃이 되어 따뜻하게 부풀어오른다

 

숲속, 하나와 또 다른 하나는 여전히 나란히 걷고 있다 <하나>와 <또 다른 하나>의 사이, <나란히>와 <걷고 있다> 사이, 길이 열리지 않는다 숲의 시간 속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서로라 부르지도 않는다 제각각 조각이 나 조각彫刻이 된다 두 개의 조각달로 뜬다

 

 


 

이은주 시인

1969년 부산에서 출생. 2000년 《다층》으로 등단. 시집 <긴 손가락의 자립>.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 부산작가회의 청년문학회 무크지 ≪쨉≫ 편집위원과 시전문계간지 ≪신생≫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