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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지우 시인 / 복도의 소용돌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5.

정지우 시인 / 복도의 소용돌이

 

                                           돌은 물의 반대 방향으로 놓여 있다

                                           그래서 물보다 느리다

 

막 열리려는 문과

귀를 쫑긋 대고 있는 문의 안쪽

막다른 쪽으로 바람은 불어온다

그건 누구나 배경일 뿐이라는 것

사람이 사물이 되어가는 일

 

첫 번째 문을 지나면서 목소리는 작아지고 비밀스러워진다 귓속에

밀어 넣은 두 번째 문이 생겨날 때 우리는 각자의 질서에 갇히고,

누구도 깨트릴 수 없는 침묵이 우두커니 복도를 지킨다

 

안이 보이는 등 뒤로 밖의 얼굴이 흘러가서 고인다

순간, 쪼그라든 사과 속의 사과

119 대원들이 싣고 가는 죽음

열흘이 지나도 모르고 오가던 복도는 겹친다

 

불행의 주머니를 뒤집으면 행복일까 마치 물속의 돌이 서로를 껴안고

휘몰아치며 바다에 닿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다

문 앞에 쌓인 택배 상자들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데

자신의 발걸음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통로

 

아무도 모르는 며칠이 귓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귀에서 겉도는 말은 복도의 말

복도가 키워낸 공명이 한 입구에서

두 입구로 우리를 돌려놓는다

 

소용돌이는 한 번쯤

나쁜 쪽으로 휘말릴 수 있고 좋은 쪽으로 돌 수도 있는 일

빠른 말 속에서 느린 말로 흘러가자는 일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익사한 듯 문들이 닫혀 있다

 

-계간 『시산맥』 ( 2016년, 겨울호) 게재

 

 


 

 

정지우 시인 / 계류​

 

 

 정면은 돌아와 있다. 물의 이면 같은 물빛에 달 속은 어떤 표출처럼 깊게 파인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안색이 삐져나온 속살처럼 움직임의 틈에 걸렸다.

 

 쇼윈도 마네킹이 매번 앞이 되는 순간이 오고 옷을 고르듯 결정해야 한다. 눈을 보고 말해. 그렇더라도 선택을 벗어나는 마네킹

 

 죽으려고 환장했어. 승용차가 스쳐갔다. 어떤 꼬리를 본 거 같은데 꼬리에 꼬리를 밟으며 앞을 놓치지 않았는데•••

 

 밟은 건 모두 떠오르는 수면에 잠겨있다.

 

 실크감촉처럼 나를 흘러갔던 무늬가 파뿌리를 다듬던 노인의 손끝에 걸쳐있고, 마지막 말을 뱉는 친구의 입술에 묻어있다는 감촉,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벗었던 허물을 다시 입는 일이 빈번한 계절

 

 마네킹 목을 뽑을 때 내 목을 만지면

 텅 빈 물음처럼 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처럼 앞이 도래했다

 

 길어진 목으로 두리번거리면 위아래로 갈라지는 새의 시간을 따라 가로등 불빛들 새알을 품은 듯 부화했다

 

 흘러내리는 건, 바닥을 모은 물의 안면이다

 

 


 

정지우(鄭誌友) 시인

1970년 전남 구례 출생.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가 있다. '낯선'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