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산 시인 / 치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5.

김산 시인 / 치명

 

 

푸른 저녁이 등의 짐을 잠재우는 시간으로 돌아가겠다.

고독의 밀실로 말하노니,

구름의 검은 조등이 맨발 아래 스멀거리는 구나.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벗은 사람 사이에서

분분히 포말 되는 거울의 말을 사랑한 적 있다.

섬이 떠다닌다. 한 섬 두 섬세 섬 선한 양들을 부르듯.

섬은 별의 공동묘지. 저기 아래,

죽음의 정박을 절체절명의 몸부림이라고 이해하겠다.

어둠이 하얗다고 소년이 소리친다. 그것은 비석의 그림자를 본

늙은 매의 날갯짓이 전생을 파닥거리는 불온한 외침.

어린 송장의 관의 문을 열고 비로소 명멸하는 저녁,

잔디들이 일제히 일어나 향을 피우며 음복을 한다.

바람의 후레자식들이여!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라.

집을 잃은 성근 별들이 뜨거운 손을 잡고,

들개 한 마리가 앞발을 천천히 거두어 가슴으로 덮는다.

바람이 분다. 죽어야겠다.

바람이 불지않는다. 그래도 죽어야겠다.

 

 


 

 

김산 시인 / 캘리포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당신의 언어는 바나나처럼 휘어져 있고

당신의 복장은 파인애플처럼 딱딱하고

당신의 머리통은 건포도처럼 메말랐고

당신의 혀는 살구처럼 시다

당신은 오렌지를 오렌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렌지 오렝지 오렌치라고 반복할 뿐이다

당신의 발음은 부정확해서 내 귀를 두근거리게 하지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새랑 했냐?"고 되물었다

새랑 뭘 했을까 여러 날을 고민했다

구관조 따오기 펠리컨 흰꼬리수리 따위를 생각했다

동물원에서 본 새들만 기억 속에 남았다

당신은 진지하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결국 사랑은 기억 속에 남은 흉터 아니겠냐고

바나나언어를 입속에 감추고

거추장스러운 파인애플옷을 입고

건포도머리통을 흔들며

살구혀를 가진 당신과 장을 보러 간다

배추는 비추 소라는 소리 소금은 손금 두부는 둔부

엉뚱한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집에 왔다

먹을 수 없는 기호들로 방이 폭발할 것 같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당신은 당신의 세계로 증발했다

배추소라소금두부국 냄새가 온 세계에 가득하다

 

 


 

김산 시인

197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2006년 <웹진 문장> 연간 최우수 작품상. 2007년 《시인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에는 『키키』(민음사, 2011)과  『치명』(파란, 2017)이 있음. 2017년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시산맥, 시월 동인. 프로젝트 포크 밴드 ‘김산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다. 2007 시인세계 신인상. 2013년 대산창작기금 시 부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