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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가령 시인 / 부재의 형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5.

김가령 시인 / 부재의 형태

사다리를 오른다 태양의 맥박 소리를 들으며 너에게 간다

밖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사실이 아니기를 상상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우리가 사다리라 불렀던 것들은 목적이 서로 다르다

넘어질 것 같지 않은 기둥의 태도가, 나이테 안의 깊이가, 품고 있던 무게가 서로 다르다

사다리에 대한 입장과 밖의 순서가 뒤섞일 때 무릎 아래로 접혀 있는 주름들, 삐걱대던 소리들

그것은 사다리의 통로이자 존재이다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과 사람들 사이로 돌아오는 시간들이 교차한다

사다리의 안쪽과 사다리의 바깥이 충돌하고 있다

손을 탁, 탁, 털고 사다리를 세운다 바깥이 깊어진다 수평이 사다리를 버리고 수직으로 돌아선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먼 하늘로 흐르는 것을 본다

사다리는 여전히 하늘과 분리되지 않는다

 


 

김가령 시인 / 뫼비우스

엘리베이터 안에서 너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간다

거울이 붙잡고 있는 것들, 명언 한 구절과 피자집번호 사이에 얽혀 있는 것들

같은 지점에서 우리는 분리된다

들어서고 사라지는 사람들, 밀착된 너와 나 한순간 무표정이 가득하다 몸을 틀어 한쪽을 보여줄 때 다른 쪽에 젖어 있을 수도 있는데 모두 앞쪽만 본다

버튼 몇 개를 누른다 방향들은 늘 가지런하다 경계들이 하나둘 생겼다가 사라진다

생각과 미끄러짐 사이

너는 내리지 않고 천장 위 윙윙거리는 모기는 분명해진다

이것이 가장 도시적인 생활일까 관습일까 어떤 존재는 속도가 사라질 때 다른 계절에서 내리기도 한다

누군가 너를 힐끗 본다 너는 당황하지 않는다

문이 닫힐 때 너는 네가 되고 나는 나로만 돌아선다

CCTV만이 너와 나에게 연결된 발화를 기록한다

​​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중에서.

 

 


 

김가령 시인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2015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