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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화진 시인 / 징거미 더듬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6.

정화진 시인 / 징거미 더듬이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는 나를 붙드는 소리

계단 입구 놀이터 쇠 그넷줄이 밤바람에 찍찍거린다

삽시간, 5층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듯한 물소리

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나는 듣는다 계단에 물이 넘쳐 흐른다

낙동강 상류가 열리며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징거미들

 

병정놀이를 하던 시냇가 모래밭

발가벗은 햇살의 모래둔덕에 부러진 나무칼이 버려져있다

천천히 칼 속에서 할머니가 걸어나온다 된장 뚝배기를 들고

뚝배기 속 끓는 흰 고무신 한 짝이 보인다

모래밭에 얼핏 뒹구는 것이 있다 무엇일까 생각하던 나는

자라를 뒤따라 냇가로 가는 흰 고무신을 본다

모래밭 저편에선 또 누가 오고 있다 단발머리의 아이가 온다

폐렴 말기의 허파를 떼어 들고 겨우겨우 온다

기암바위 그늘에서

문드러진 손가락의 얼굴 없는 사내녀석이 아이의 작은

허파 하나를 잽싸게 나꿔채간다

 

계묘년 비는 붉게 내렸다, 붉게

온 들이 황톳물 속에 잠기고 아이의 입술이 노란 칼의 마당에서

푸득거리다가 쓰러져갔다 아이의 입술을 세우며 할머니가

냇가에서 울었다 냇물에는 몇 개의 잘린 자라 목이

떠내려 가고

아무도 몰래 할머니는 약사발에 묻은 피를 씻었다

입술을 열고 붓던 자라의 피와 가느다란 영혼 하나를

할머니의 손을 나는 보았다

시냇가 미루나무 아래 편 물풀 그늘에는

아이의 얼굴만 게워내는 골뱅이들이 소복이 쉬고

나무칼이 물풀에 걸려 맴돌며 시냇물을 잘라내고 있었다

 

이 밤, 누가,

5층에서 골뱅이 껍질을 쏟아붓는다

나는 귀를 막고 계단을 올라간다

아파트 아이들이 놀다 버린 나무칼이 현관문 아래 버려져

낙동강 상류를 자르고 있다

나무칼 속에서…… 골뱅이 껍질들이 쏟아져 나온다

부러진 나무칼, 병정놀이를 하던 모래밭,

흰흰흰흰 고무신 한, 짝,

나는 징거미 더듬이가 가득 묻어 있는 현관문에 귀를

바짝 들이댄다

한쪽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조 용 하 다

 

 


 

 

정화진 시인 / 너는 길이 어두워 꽃을 보지 못했구나

 

 

넌 왜 기웃대니?

멍든 눈자위를 하고

붉은 입술을 달고 가면을 쓴 채

와 울고 있니? 미래야

길이 어두워 꽃을 보지 못했구나

해변은 가을 낙엽, 부서진 가옥들로 창백하구나

그이는 그 길 위에 주저앉아

섬만 보고 있네 바다는 원래 고체였잖아

넌 왜 이쪽을 아직 기웃대고 있는 거지?

해진 옷, 기울어진 길, 무너지는 집들이

새삼스러워 보이니?

우린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숲을 잃고 새떼를 먼저 망명지로 보냈잖니

독재자들만 노예를 기르고 있구나

태양이 뜬다, 사케르

산정의 제단에 오늘은 바람이 누워 있다

너는 부엌을 벗어나 맨발로

어디로 가고 있니?

시간의 해일 속으로 우리는 정처 없단다

가야할 길이지만

해변은 짙은 가을이다

 

-시집『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문학동네, 2022)

 

 


 

정화진 시인

1959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86년 《세계의문학》 가을호에 〈칼이 확대된다〉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장마는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민음사, 1990)와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민음사, 1994),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가 있음. 현재 '오늘의 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