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진 시인 / 귀
절벽 같은 무늬를 가진 나무는 어두운 귀처럼 말이 없다
어두운 귀가 나무의 소리를 모은다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시간을 보듬으면서 나무속에는 잘린 나무가 가득 들어있다
ㅡ 『시인시대』(2022, 여름호)
최서진 시인 / 홍매화, 그 붉음에 대하여
언니의 오래된 결혼식 비디오에는 죽은 할머니가 걸어다닌다 죽은 아버지가 걸어다닌다 심장이 있는 흉터의 모양으로
홍매화 송이 숨소리처럼 바스락 피어난다 지워진 손금마다 서로의 비밀이 붉어진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을 외우다 혼자 어두워진다
화면에서는 고무풍선이 아직도 터진다
공중에 뜬 죄를 필사하듯 막다른 시간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불빛들 불빛은 환할 때가 가장 슬픈 목숨 같다
지금은 다른 방향의 밤하늘 아래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백 년의 숨을 들이마시며 우리는 서로 다른 잠을 자고 있다 매화가 어디선가 혼자 피는 줄도 모르고
언니가 비디오에서 느리게 걸어 나온다 나는 이런 생을 살아 본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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