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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린 시인 / 서민생존헌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7.

하린 시인 / 서민생존헌장*

나는 자본주의적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서민으로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가난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신용불량자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약소국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생존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출근과 튼튼한 육체로,

저임금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출신을 계산하여,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기초수급자의 힘과 월세의 정신을 기른다.

번영과 질서를 앞세우며 일당과 시급을 숭상하고,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헝그리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발전하며,

부유층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지름길임을 깨달아,

하청에 하청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잔업 전선에 참여하고 월차를 반납하는 정신을 드높인다.

부자를 위한 투철한 시다바리 따까리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며,

자유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가난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서민으로서,

조상의 궁핍을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빈민을 창조하자.

*1968년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 패러디

-시집 『서민생존헌장』, 천년의 시작, 2015

 

 


 

 

하린 시인 / 어머니의, 어머니의 의한, 어머니를 위한 가능성

 

 

어머니도 바람이 될 수 있다

아침나절과 저녁나절

마음속에서 불고 있는 것이

식솔들을 향한

생각들만은 아니라서

어느 순간 방향이 될 수 있다

 

어머니도 극장이 될 수 있다

관객인지 주연인지 모를 생을

50년 넘게 살았으니

흥행인지 실패인지 알고 싶은

마음을 펼칠 수 있다

 

어머니도 퍼즐이 될 수 있다

모든 걸 다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기치 못한 낯선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며

감춰둔 밑그림을 증언할 수 있다

 

어머니도 음악이 될 수 있다

밭고랑의 리듬과

아궁이의 뜨거운 선율을

몸으로 다 읽어냈으니

육화(肉化)된 노래를

치매의 순간에도 흥얼거릴 수 있다

 

어머니도 척을 위해 척을 버릴 수 있다

깊은 밤 달에게 별들에게 들으라고

길게 내뿜었던 한숨에게 미안해서

오장육보에 척만 가득 채운 게 머쓱해서

척을 마침내 속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도 바깥이 될 수 있다

자신 안에 소문을 키울 수 있다

고도와 고독을 동시에 품을 수 있다

웃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시와 소금〉 2021년 가을호

 

 


 

하린(河潾) 시인

전남 영광에서 출생.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이 있고,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와 시 창작 안내서 『시클』이 있음. 청마문학상 신인상(2011),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2015), 한국해양문학상 대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