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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인 시인 / 일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8.

김정인 시인 / 일출

 

 

분만실 창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로

수평선이 여러 겹 겹쳐 있다

나는 등 뒤로 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찢고 나오는 우렁찬

햇살 기다리고 있다

해가 내게 당도하려면 울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생각

 

산모는 해를 밀어낼 통로를 여느라 제 살 찢는데

혈압 체크하던 간호사는 갈 길 멀었다는 듯

수액 빠진 링거 다시 갈아 끼운다

견딜 수 없이 조여드는 가슴

딸과 나의 공통분모는

탯줄의 출구를 묶고 번진 피 아물기를 기다리는 일

 

안이 젖은 고무장갑 뒤집어 말리듯

항문으로 온 힘 밀어내는 소리 들리는데

‘머리가 3센티 보여요!’

떠오르는 그 해 눈부셔 눈부셔 차마 바라보지 못하다가

으앙, 터진 울음 받아 올리다

 

―『유심』(2011, 3/4월호)

 

 


 

 

김정인 시인 / 십자가

 

 

이마에서 가슴으로

심장 깊숙이

성호를 긋습니다

봉숭아 꽃물 들인 새끼손가락은

철 안든 아이처럼 맥도 짚지 못하며

장지만 따라 다닙니다

기도의 중심은

몸과 마음이 주님께 향하는 곳에 있다는데요

그 새끼손가락

십자가 건성으로 지고 가는 내 모습 같아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내 십자가 내가 튼튼히 못 박을 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

왜 모른척하고 살았을까요

 

<시와 십자가> 중에서

 

 


 

 

김정인 시인 / 절망도 배꼽이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라퀼라가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휘어진 철골에 스며든 어둠은 쓰레기 더미와 버무려져 더욱 캄캄했는데

죽음의 안쪽에서 땅이 꺼진 서른여섯 시간을 뜨개질한 저 여자,

아흔여덟 살의 그녀가 절망의 시간과 맞서는 일은

가물거리는 허공을 한 코씩 잡아 꿰는 일

매몰된 시간들을 끌어당기는 일

 

오그라든 입술에서 탄식처럼 터져 나오는 공포를 지그시 앙다물고

하던 일 그대로 끌어다 뜨개질을 한 저 여자

한 코 한 코의 독경이 경전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머리 처박고 구른 털실뭉치도 찾아가는 몸이 있는지

길게 뽑혀 나온 길을 따라

바늘코를 따라간 제 탯줄 바싹 잡아당긴다

통증의 진앙지를 옭아매던 굽어진 손마디가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더욱 꼿꼿해졌다

 

 


 

김정인 시인

서울에서 출생. 경북 상주에서 자람. (본명: 金貞熙).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도록 내 안에서』(문학수첩, 2004), 산문집 <엄마는 7학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