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 시인 / 일출
분만실 창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로 수평선이 여러 겹 겹쳐 있다 나는 등 뒤로 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찢고 나오는 우렁찬 햇살 기다리고 있다 해가 내게 당도하려면 울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생각
산모는 해를 밀어낼 통로를 여느라 제 살 찢는데 혈압 체크하던 간호사는 갈 길 멀었다는 듯 수액 빠진 링거 다시 갈아 끼운다 견딜 수 없이 조여드는 가슴 딸과 나의 공통분모는 탯줄의 출구를 묶고 번진 피 아물기를 기다리는 일
안이 젖은 고무장갑 뒤집어 말리듯 항문으로 온 힘 밀어내는 소리 들리는데 ‘머리가 3센티 보여요!’ 떠오르는 그 해 눈부셔 눈부셔 차마 바라보지 못하다가 으앙, 터진 울음 받아 올리다
―『유심』(2011, 3/4월호)
김정인 시인 / 십자가
이마에서 가슴으로 심장 깊숙이 성호를 긋습니다 봉숭아 꽃물 들인 새끼손가락은 철 안든 아이처럼 맥도 짚지 못하며 장지만 따라 다닙니다 기도의 중심은 몸과 마음이 주님께 향하는 곳에 있다는데요 그 새끼손가락 십자가 건성으로 지고 가는 내 모습 같아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내 십자가 내가 튼튼히 못 박을 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 왜 모른척하고 살았을까요
<시와 십자가> 중에서
김정인 시인 / 절망도 배꼽이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라퀼라가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휘어진 철골에 스며든 어둠은 쓰레기 더미와 버무려져 더욱 캄캄했는데 죽음의 안쪽에서 땅이 꺼진 서른여섯 시간을 뜨개질한 저 여자, 아흔여덟 살의 그녀가 절망의 시간과 맞서는 일은 가물거리는 허공을 한 코씩 잡아 꿰는 일 매몰된 시간들을 끌어당기는 일
오그라든 입술에서 탄식처럼 터져 나오는 공포를 지그시 앙다물고 하던 일 그대로 끌어다 뜨개질을 한 저 여자 한 코 한 코의 독경이 경전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머리 처박고 구른 털실뭉치도 찾아가는 몸이 있는지 길게 뽑혀 나온 길을 따라 바늘코를 따라간 제 탯줄 바싹 잡아당긴다 통증의 진앙지를 옭아매던 굽어진 손마디가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더욱 꼿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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