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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현상연 시인 / 가지치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3. 21.

현상연 시인 / 가지치기

 

 

묵은 봄이 잘려 나간다

오른쪽 방향과 왼쪽 방향도 사라졌다

 

나무는 봄볕에

웃자란 가지를 단속하지 못했다

 

고목은 햇빛에 흔들렸고

치밀한 가지는

새봄을 채우려 욕심껏 자랐다

도착하지 않은 여름을 기대하며 꽃눈을 밑동까지 달기도 했다

 

부푼 꽃망울에 귀 세운 다른 가지

떨어지는 나무비듬을 보며

그늘 속 마디의 처진 봄을 솎음질 한다

바람이 드나들 통로에

가지 하나 내주면 두 팔을 달 수 있다고

애써 통증을 참는다

아직 물 마르지 않은 모래톱엔 계절이 몇 번 다녀갔는지

잔물결이 겹겹이 쌓였다

 

상처로 얼룩진 곳

복대기는 햇살이 덮는다

털어버릴 수 없는 물관 사이로 빼꼼히 내민 곁눈

추위를 견딘 살구꽃망울이 짙고

전정가위와 대립하던 멍울진 봄이 화사하다

 

 


 

 

현상연 시인 / 얼음의 얼굴

 

 

밤새

괴산호가 슬픔을 가뒀다

 

이튿날 아침

몸을 뒤척이는 짐승들 울부짖음에

꽝꽝 언 호수로 귀가 끌려갔다

 

정오의 햇살이 등잔봉*을 내려와 호수로 들어가고

정수리를 파고든 빛은 팽창되어

틈새에 튕겨지는 울음소리

쩌엉!띵!꾸룩!

 

앞서간 발자국 따라 번지는

울음의 갈피마다 끼워진 빛의 소리, 소리들

 

하루치 햇살에 금이 가면 얼음도

방전될 때가 있어

비 맞고 쪼그려 앉아 우는 물의 목소리만 듣는다

 

무리에서 떨어진 한파 몇 조각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굴피나무 껍질 같은 12월,

상처 난 짐승은 침묵하며 은신중이다

 

 


 

현상연 시인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한국 방송 통신대 국어 국문학과 졸업. 2017년 《애지》봄호 신인 문학상 수상 등단.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애지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