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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홍 시인 / 니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

박홍 시인 / 니은

 

 

종로의 대로변 뒤쪽으로 구불거리며 따라가는 골목같은 니은이다.

드러내지 않아 편안하게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헐렁한 옷 같은 니은이다.

술 먹고 흔들리는 걸음

그냥 풀어놓고 싶은 니은이다.

니은이 만들어내는 그 어슴푸레한 무늬는

 

기역이나 디귿이 만드는 소리보다

아, 이, 무 하고 모음 앞에서 사라지는 이응보다

까칠하게 발톱세우는 티읕이나 치읓 같은 혀끝소리보다

어머니 아버지 뒤에

한 발 물러서 있는 누나 같은

뒤꿈치에 붙어 그림자처럼 가만히 있는 니은은

 

꺼이꺼이 목 놓고 울고 싶은 적은 없었을까

 

아, 'ᄂ'자로 길게 누워

방바닥 두들기며 뽕짝이나 부르다 가고 싶다

 

 


 

 

박홍 시인 / 나의 옥상 와이너리

 

 

 옥상에서 포도주를 담그는 날은 우리도 즐거운 수공업자가 되는 거다

 

 그래, 터질 듯 까맣게 익은 포도알을 으깰 때면 느끼지 캄캄한 여름밤의 까만 여름밤의 즙액이 흘러나오고 아득한 거리를 달려 온 황도십이궁의 별빛이, 밤새 어딘가로 흘러가던 은하수의 물소리가, 은하전파를 타고 날아 온 우주의 씨앗들이, 알 수 없는 암흑 물질들이, 물결처럼 출렁이던 보름달빛과 초승달빛들이 부화하는 알 속의 핏줄처럼 툭, 툭 터지면서 향기를 내뿜는 거야. 태아처 럼 웅크리고 있던 여름 한낮의 고요도 하늘에다 울컥울컥 단내를 하늘에다 토해내지, 희미하지만 폭우와 폭풍의 냄새도 풍긴다 네. 쉬고 있으면 먼 곳의 천둥소리가 거품이 되어 떠오르는 것도 보인다네.

 

 그때쯤이면 근처에 있던 벌과 나비들이 날아오기 시작하는 거야

 꽃등에가 방향을 잘못 잡은 머리호박벌을 데려오고

 도시처녀나비와 시골처녀나비가 손잡고 날아오고

 검은테떠들썩팔랑나비도 날아온다네

 간간이 아내와 딸아이는 머리호박벌에게 호통도 치는데

 멀찍이 하늘 끝으로 내려앉은 뭉게구름은

 하늘을 또 하나 항아리로 속에 가둔다네

 

 그런 뒤에 바람과 햇살과 천둥소리와 밤의 즙액들이

 빠져나가지 않게끔 꼭꼭 밀봉하는 거야

 부글거리면서 저희들도 새롭게 태어나려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겠지

 그때 한 번쯤 뒤집어주는 거야

 다시 힘든 시간을 기다렸다가

 육탈시키듯 걸러버린다네

 냉장고에 넣고 차게 해 두면

 육신의 희미한 기억들까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투명한 붉은 영혼이 만들어진다네

 병에 넣고 조심스레 눕혀서 잠을 재우는 거야

 

 어느날

 주먹처럼 커다란 별들이 내려와 둥둥 떠다닐 때가 있을 거야

 우리 어렸을 때처럼 말이야

 그러면 잠재웠던 영혼을 하나씩 흔들어 깨우는 거야

 투명한 붉은 영혼 속에서 깨어난 별들이 춤을 춘다네

 그때부터 은하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네

 

 


 

박홍 시인

부산 출생. 본명: 박홍식. 경희대 화학과 중퇴. 2010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의 옥상 와이너리』(시와표현,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