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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율 시인 / 기차가 사라질 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

이하율 시인 / 기차가 사라질 때

 

 

군홧발 소리를 내는 기차와 1번국도 위 내가 나란히 달린 적 있다

강경 지나 697 도로,

개태사역을 스치며 하품 하는 산이 보일 찰나

숨 가쁘게 모퉁이 돌던 기차를

웅크린 검은 그늘이 단숨에 삼킨 거다

 

젓갈 냄새 먹은 칸칸,

입영열차가 던진 빵조각을 초유로 빨던

아직 낫지않는 부스럼도 환승 했을까

가파른 모순의 경계를 서슬서슬 건너고 있을까

언젠가 우리가 짜게 맛 보았을, 눈앞에서 잃어버린 배고픈

기차, 충혈된 눈으로 다시 모색하는 황산벌 잔햇길

 

방금, 오래 자라 거대한 땅거미를 앞세운 노을이

주름진 계백의 갑옷에 굴절해 반도의 척추를 빨갛게 관통했다

 

진동, 파동, 내림, 오름, 반복의 견딤,

어느 복선에서 외면했을지 모를 교행,

정전된 기억의 재형상을 빠르게 그리고 지운다

재생하는 꼬리를 자르며 내달리던 발자국들

터널 앞에서 탈선한다 발목 없는 군화,

식은 자갈 속 잃어버린 뒤꿈치를 찾아 꿰고 있다

 

 


 

 

이하율 시인 / 백야를 읽는 밤

-밀폐된 타일 독서실의 몽환

 

 

한밤중 수조의 레버를 내리자 시작되는 여행이 조급하다

잠옷 차림인데다 날이 새기 전 돌아와야 하기 때문

 

그래서 나는, 하수관 속으로 물의 유령처럼 휘어져 사라진 내가

그곳 함메르페스트에 한 번에 뚝 떨어지길 빌었다

 

파열된 밤낮의 경계, 일 년의 절반은 어둠 잃은 밤,

해 몰이 안무 지어 즐기는 오싹한 춤의 극야

 

해적 모자에 돋은 뿔 문장을, 후티루텐* 선실 가득 어질러놓고

홀로 늘이고 줄이고 꿰메고 있는

 

삐뚤어진 나는 나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온 낯선 해협의 유숙자

그때 백년의 약속 같은 건 벌써 잊었다

 

북극곰이 선실 창 밖으로 손 흔들며 지나가고

초록의 오로라를 만나는 매일매일 우아한 나는 지금,

 

자오선 기둥 아래 지구의 극점 천정과 천저 사이에 있다

 

지평선 아래로 더는 기울지 못하는 해가

억만 겹의 광선으로 멋대로 분열해 마구 쏘아 붙이는 시간,

극점에서의 185박 186일이 귀신고래의 숨쉬기 보다 짧았으나

 

가려운 왼쪽의 얼굴을 감추고 오른쪽으로 틀며 돌아가자

저기, 고요하거나 고요하지 않은 독서실이 닫히기 전에

 

다행히 내가 고래의 투명 아가미를 이식한 걸 아무도 모른다

 

*후티루텐 : 함메르페스트에 정박하는 노르웨이 해안 유람선

 

 


 

이하율 시인

충남 홍성에서 출생. 2011년 ≪詩로 여는 세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