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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혜정 시인 / 분해자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

허혜정 시인 / 분해자들

 

 

폐차 들어오지 않는 마당은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낡은 세무잠바를 걸친 사내 하나

고철이 된 차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녹슨 쇠철문이 열리고, 제철공장 같은 도시에서

끝없이 자동차가 쏟아져나올 때도

하나하나 잘라낸 문짝들을 쌓아놓고

싸구려 중고차 부품을 뜯어내는 손길이 있었다.

바람에 침울하게 덜컹이는 강철 문짝 곁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토록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들과

허망한 폐허로 내모는 소리 없는 위협들

브레이크등이 깨진 채 폭주하는 타이탄 트럭처럼

고통마저 짓밟고 간 무감각한 질주를

모두가 속도의 출혈을 꿈꾸고 있다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무거운 지도책과

메마른 두개골을 쳐들던 일몰의 헤드라이트

때로 트렁크째 벌어져 산산이 튀어오르고픈 도로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못할 격돌의 분노를 수습하면서

온갖 책과 종이뭉치가 무너져 있는

그 척박한 공간을 지켜야 했다

언제부터인지 헤드라이트도 끊어진 도로 끝에

턱턱 갈라진 폐차들의 튼 얼굴이 뒤숭숭하니 드러나는 곳

잡초 뿌리마저 매몰시켜버릴 먼지에 눈이 쓰릴 때

여기 마지막 분해자들이 있다

어두운 슬픔에 담뱃불을 붙이면서

낡은 고철더미를 묶고, 판독조차 할 수 없는

매연이 시커멓게 엉긴 번호판을 뜯어내고

닳아빠진 부품과 타이어를 손보고 넘기는 이들이

 

 


 

 

허혜정 시인 / 바다로 가는 길

 

 

먼지투성이 마른 도로에서

늙은 여인이 길을 가리켜준다

핏기없는 소년이 신문꾸러미에 주저앉아

빵을 먹고 있는 길

바람에 헝클어진 야윈 가지가

낡은 티셔츠에 그늘을 드리우고

텅빈 공기 속에 안보이는 제단이 서 있었다

소줏병 깨진 유리조각이 박힌

낡은 가옥이 멋없이 늘어선 곳에

마른 안테나는 텅빈 여름 채널을 수신하고

걷고 있는 동안 자전거를 끌고

물가고 내려가는 아이의 머리칼은

바닷바람에 날리고 있다

허름한 민박집, 호마이카상에

교과서를 올려놓던 아이는

엄마가 아파서 아무 데도 못간다고 했다

비좁은 골목길로 흘러든 바람은

녹슨 가재도구를 더욱 녹슬게 하고

한 걸음 나서기도 무거운 다리를 끌고

누렇게 뜬 얼굴로 수돗가로 다가가던 여인

어느 옛날에나 본듯한 파리 날리는 식당

무서운 제국을 바라보는 작을 걸상들

해수욕장도 못될 초라한 해변에는

아직도 남루한 사람들이

낡은 폐선들을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이 모든 것을 쓸어갈 수 있다면

바다로 가는 길은 있으리라

 

 


 

허혜정 시인

1966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同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7년《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5년 《현대시》 평론상에 당선,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인이며 평론가로 활동. 2010. 제11회 젊은 평론가상, 동국문학상 수상.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