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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희 시인 / 책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

김지희 시인 / 책

 

 

노을이 여자를 읽고 있는 저녁 어스름

언제부터 그 여자

도서관에 꽂혀 있었는지 몰라

세상 어디쯤에 꽂아 둔지도

언제 끼워 둔지도 몰라

세상, 성게처럼 헤매던

한 여자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는데

 

아무도 그 여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 없고

자신조차 다 읽어내지도 못했는데

폐관 시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네

 

- 시집, <토르소>(시와문화, 2015)

 

 


 

 

김지희 시인 / 봄날에 격투하다

 

 

추운 봄날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 ‘여자만’ 앞에서

나를 만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의 묘비란 찻집 지나

혼자서 어둠을 먹는 여자 지나

갇혀 있던 새장 속의 새 지나도록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는 당신

시간을 뚫고 나가는 길

한 무더기 꽃과 같은 불빛은 찬란하기만 한데

나는 당신의 가슴께를 맥없이 부딪친다

심장의 뼈에 금이 갔는지… 욱신

그래도 당신은 태연하게 나를 앞서 간다

 

심장이 아파하는 소리에 연고를 바르지만

여전히 아물지 않은 나,

갑자기 피맛골 주점으로 데려가더니

혼자 연거푸 비우는 술잔

마음 깊은 곳까지 흐르지 못한 술은

한 소절 유행가 가사로 쏟아지고

서로 쓰다듬을 수 없어 울렁거리는 속

그래 마셔요 그 어떤 파도가 온다 해도

심장에 부딪치지 못하는 이 밤

당신이 자꾸 슬퍼 보여

그건 우리가 부딪친 술잔의 문제만은 아닐 텐데…

 

그랬지요 오래 전부터 당신,

 

배가 고파 저녁풍경을 먹어치우고

제 심장에 불을 방화하고

거울 속 낯선 이의 얼굴을 그리고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맨몸을 데우며 그렇게

그렇게 흔해빠진 세상을 질주하다

뭉클, 벽 너머의 당신을 보았지

 

그런 나에게 참 많이 화가나 있었으며

때론 미워도 했다는…

 

늦은 밤, 세상 어둠을 고소한 냄새로 들려줘야 한다며

참기름 듬뿍 담은 봄나물을 가슴에 넣고 있는 당신!

 

 


 

 

김지희 시인 / 사막을 건너는 저녁

 

 

저녁놀 비낀 그림자는 제 키보다 크다

 

해질 무렵 아파트 놀이터

학원서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다

모래에 박힌 기둥 흔들리는 철봉에 매달려 본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서야

한 여자가 제대로 보인다

계단 끝 아득하게 서 있는 그 여자의 그림자들이 밟혔다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것이 보인다

세상을 향한 삶의 통로가 보이기 위해선

천개의 바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

 

영화 한편 보자고 한낮에 전화 줄을 타고 온 동창

때론 그 개봉 시간에 맞춰 달려가고 싶지만

풋풋한 아침에는 식구들 출타 준비로

온 몸 다 닳도록 밥 푸는 주걱 되어야 하고

한낮에는 온 집 헤매는 청소부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부서진 꿈을 쓸어 담아야 한다

등이 굽은 밤이면 다시 여자가 되어야만 하는

젖은 솜처럼 머리가 무거워진 순간

개봉관 영화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여자

밤바람 불어 식어가는 가슴에 등불 하나 걸어 둔다

 

 


 

김지희 시인

경북 성주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2006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 2014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토르소』 출간(2015) 『하늘은 무청처럼 푸르렀다』. 문학에세이집 『사랑과 자유의 시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