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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종섶 시인 / 눈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

이종섶 시인 / 눈물

 

 

 어린 연어가 먼 바다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짓는 어미, 그 물이 1급수인 것은 어미가 흘린 눈물 때문이다

 

 새끼들이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목숨을 걸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미의 눈물이 그리워서다

 

ㅡ 『시인시대』(2022, 여름호)

 

 


 

 

이종섶 시인 / 늦둥이

 

 

주먹만 한 녀석들을 주렁주렁

땅속에서 키우던 감자가 힘이 부쳤는지

오래전에 수명을 다하고 말았는데

 

허공에 칸칸이 마련해준 방마다

튼실한 씨알들을 기르던 옥수수도

일찍 기운이 딸렸는지 벌써부터

수염이 늘어지면서 조로하다가

무더위 끝에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는데

 

무성하게 자라던 텃밭의 작물들 모두

여름이 지나자마자

성장을 멈추고 급히 노쇠해버렸는데

 

얼기설기 힘 좋은 호박은 아직도

입가에 웃음을 살살 흘리며 넝쿨을 뻗어

넓고 푸른 새 잎사귀들을 두르고

그 수더분한 치마폭 속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면서

탐스런 애호박까지 달고 있었다

 

향을 다른 밭에 퍼트리기 일쑤였고

고소한 깨가 쏟아지는 달밤을

동네방네 부러워하게 만들었던 들깨조차

자잘한 깨알들을 털기에 여념이 없어

손바닥만 한 깻잎쌈을 더 이상

밥상에 올려주지 못하는 가을인데도

 

호박은 남사스럽게 깨밭까지 손을 뻗어

여전히 쌈 싸먹기 딱 좋은

싱싱하고 물컹한 호박잎을 내면서

연둣빛 순한 호박덩이까지 안고

보란 듯이 능청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종섶 시인 / 버려진 드럼통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하늘만 쳐다보는

외진 바닷가 고래 한 마리

심해의 밑바닥에서 들이마신 검푸른 석유를

뱃속에 가득 채우고 살던 어느 날

뼈와 살과 내장까지 한꺼번에 빼앗긴 후

껍데기만 남은 산송장이 되었다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 동그랗게 벌린 입

바람이 드나들며 움직여주니

기다렸다는 듯 울음부터 쏟아놓는다

눈물 위에 드문드문 부표처럼 떠있는 말들

알아듣기 힘들어 가까이 귀를 대는데

멎었던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간다

먹은 것 없이 비워내기만 하면서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소진해버린 탓에

스스로 일어설 기운조차 없는 몸

어쩌다 평생 살았던 바다에서 길을 잃고

낯선 해변에 떠밀려와 울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 남은 기름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은 업자가

돈푼이나 겨우 받을 딱딱한 가죽

고물상까지 팔러 가기가 귀찮다는 듯

아무데나 던져버리고 떠난 날부터

몸피 안쪽에 묻어있는 기름 향을 맡으며

목숨을 연명하는 사향고래 한 마리

공복의 쓰라림은 녹슬지 않는다

 

-<작가연대 2011년 후반기>

 

 


 

이종섶 시인

1964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졸업. 2007년 기독교타임즈문학상 '점자경전' 당선.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물결무늬 손뼈 화석』가 있음.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