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시인 / 결별
흘러가야 강이다 느리게 때로 빠르고 격렬하게
그렇게 이별해야 강물이다 멀찍이 한 떨기 각시 원추리와 반들거리는 갯돌들과 흰 새들과 착한 어부와 몸을 씻으며 신성을 비는 사람들과
돌아선 발이 뻘밭인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우리들 할 말이야 저 강물 같아도
너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난 손을 모아 그 물을 마신다 흘러가니까 괜찮은 일이다
우리는 취향이 다른 음악처럼 마주 보고 흐르거나 다른 지류로 알 수 없는 유형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흐르고 흘러 너와 내가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그래서 오늘의 모습을 까마득히 잊고 반갑게 서로 포옹할지도 모른다
김이듬 시인 / 몽유도원
불 꺼진 방이 편하다 혼자 먹는 저녁과 말 붙이지 않는 이웃들 텅 빈 우체통 오지 않는 전화에 아무 느낌이 없다 여기 오래 살 것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살았던 것처럼 베를린 변두리 작은 방에서 나는 이곳에 아무렇지도 않다 십오 주 동안 창밖의 사과나무가 변하는 동안 진초록이 옅어지다 엷어지다 연두가 아니라 붉은 색이 되는 구나 그 사과가 하루하루 붉어 가는 동안 해는 짧아진다 오늘 낮은 더웠다 눈동자가 하늘색인 한국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시에 나오는 정화수를 설명하는데 그게 정화조에 담긴 물이냐는 질문에 장독대 어쩌고 하다가 시간이 끝나 버렸다 내가 칠판에 우물을 그린 후 그 물이 정화수가 되는 신비를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어도 여기 애들은 정확하게 시계를 보고 나가 버린다 목이 타서 정화수라도 마셔 버릴 것 같은데 수도에서 석회수만 나온다 슈퍼 입구에 수박을 쌓아놓고 팔던데 못 사먹고 있다 수박이 천도복숭아만 하다면 좋을 텐데 통째 썰어도 혼자서 다 먹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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