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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동윤 시인 / 어떤 삶의 방정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8.

임동윤 시인 / 어떤 삶의 방정식

 

 

민물과 짠물이 몸을 섞는 교각 밑에서

사내는 인양되었다

죽어서도 손잡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듯 핏기 없는

한쪽 팔이 거적 밖으로 뭉툭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사내는 다리 난간에서 훌쩍 몸을 날렸을 것이다

그리곤 오래 용궁을 찾아 헤매다가

끝내 이 강기슭에 정박했을 것이다

급류에 휩쓸리면서도 퉁퉁 불은 발을 감싼

그의 구두는 궤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만월처럼 부풀어 오른 배는 금세

터질 듯이 탱탱해져 있었고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반쯤 벌어진 입은

이끼와 물땅땅이 가로막고 있었다

마침내 세상의 꼬리표를 잘라낸 사내

유서 한 장 주머니에 남아있지 않았다

길고도 먼 여정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다만 힘든 세상을 떠돌았노라고

부릅뜬 그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앰블런스가 달려오고

축 늘어진 몸을 재빠르게 싣고 갔다

그리곤 이내 적막이 감돌았다.

사내의 체취가 채 가시지 않은 강기슭

눈을 들자 곳곳에 팻말들이 붉게 세워져 있었다

출입금지!

 

 


 

 

임동윤 시인 / 가벼운 것이 그리운 저녁

 

 

 눈 내린 고향집 마당에서

 참새 떼가 푸른 아침을 물고 한참을 놀다 갔다

 눈향나무에 이는 은물결 햇살을 맘껏 주워 먹다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수없이 많은 발자국을 찍어주고 갔다

 혹한과 바람 속을 견뎌온 저 말간 발들, 수십 번 오갔을 텐데 눈밭은 오히려 솜사탕처럼 부풀어있었다 막 문을 여는 꽃봉오리처럼, 그것은 희고 순결한 눈밭에 검푸른 점 하나 남기지 않으려고 적게 먹고 날개의 부력을 한껏 높인 탓이다 어느 것 하나 다치지 않게 제 몸의 무게를 줄인 탓이다

 어쩌면 새는, 누군가를 짓뭉개는 일은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고도 버렸을 것 이다 저마다 자리를 독점하기 위해 눈 붉히며 몸집을 불리는 그대들과는 애초부터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어깨마다 걸린 무거운 짐이 저 순결한 눈밭에 검고 깊은 자국을 남긴다는 것을 새들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을 것이다 허허롭게 바람의 길을 가는 가랑잎과는 달리

 쌓이는 눈덩이 스스로 몸 흔들어 무게를 줄이는 소나무와는 달리

 눈 내린 마당 한가운데에 무겁게 찍히는 내 몸무게를

 오오, 검게 찍히는 발자국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 고민하다 왔다

 

 


 

 

임동윤 시인 / 서면일기 10

 

 

연이틀 내리는 눈으로 모든 것들은 문을 닫아걸었다

통고산을 휩쓸고 내리는 눈보라가

뒷산 박달나무와 자작나무의 곧은 결기를 후려치면서

물푸레나무와 싸리나무의 휘어지는 허리를 꺾고 있었다

폭설을 견디지 못한 소나무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만

헐거운 문풍지 사이로 들어와 온기 없는 방을 맴돌았다

 

멧돼지와 승냥이 울음으로 계곡이 가팔라지고 있었다

밤새 바람이 몰고 오는 눈사태, 대설경보

'삶과 죽음의 경계는 늘 가까이 있었다

이런 밤은, 늘 길 밖의 길을 떠돌게 되고

바람은 굶주린 겨울 짐승들을 몰고 다니는 매파(媒婆),

어머니가 저녁을 마련하던 화덕 언저리로

꽁지 짧은 잿빛 굴뚝새는 이 밤에도 날아올 수 있을까

 

뜨거운 아랫목에 몸을 녹였던 사람들

봄이 되어도 어느 누구 하나 마을을 떠날 수 없듯이

짐승들 이 겨울 눈보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쌓이는 눈과 가야할 길이 모두 끊겨서

눈을 녹여 식수를 만드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약삭빠른 것들은 모두모두 마을을 떠나갔지만

그래도 눈보라는 늘 남은 사람들과 일가(一家)를 이룬다

 

모든 것은 눈 속에 얼어붙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손바닥만 한 불씨 한 점 남아 있지 않지만

직립의 금강소나무 하늘 찌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폭설 속에 갇힌 저 길 밖의 길은 아득하지만

밤새 꽁지 짧은 굴뚝새 한 마리 나를 읽는지

따뜻한 처마 밑에서 또록또록 눈을 밝히고 있다

 

 


 

임동윤 시인

1948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 196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2년 《문화일보》(시조) 신춘문예와 1996년 《한국일보》(시)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은빛 마가렛』 『연어의 말』 『나무 아래서』 『함박나무가지에 걸린 봄날』 『아가리』 『따뜻한 바깥』 등이 있음. 2002년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 임화문학상 수상. 2010. 제1회 김만중문학상 유배문학상 수상. 현재  <表現>, <行詩>, <牛耳詩> 동인으로 활동. 현재 월간 <우리시> 주간. 계간 <시와 소금> 발행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