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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영준 시인 / 고정관념에 대하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0.

권영준 시인 / 고정관념에 대하여

 

 

 1

 아침에 일어나니 내 머릿속에 이상한 혹이 하나 만져졌다 굳은살처럼 딱딱하게 응고된 이 덩어리는 언제부터 내 생각 속에서 조금씩 돋아났던 것일까 망막의 유리문을 통해서만 간신히 보이는 그 덩어리의 뿌리, 뿌리가 하도 깊어 수술로도 제거할 수 없는 그것을 나는 맹장처럼 늘상 달고 다녔던 것이다.

 

 2

 생각하면 그것은 처음에 천평처럼 여리고 사납게 흔들리다

 그 위태로운 흔들림이 한쪽으로 기울어

 티눈처럼 돋아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의 더께가 채곡채곡 쌓여

 실핏줄이 뻗어 들어가고 생각이 담겨

 내 몸의 장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팔처럼 뒤틀면 아프고

 살갗처럼 꼬집으면 멍들고,

 천연덕스레 남의 육체에 기생하며

 땅 위의 온갖 흐린 눈빛들 틈새에서

 난해한 잠언이 되어

 선한 생각들을 송두리째 죽이기도 하는,

 

 고등동물의 두뇌 속에서

 아름답게 돋아난

 뻔뻔한 나의

 종유석.

 

 


 

 

권영준 시인 / 이번 생은 성공이다

그래, 오늘 하루는

잠들지 못하는 고단함조차

물푸레나무 수액처럼 싱그러운 날

저녁은 소리 없이 자박자박 나를 찾아와

깊은 바닷속으로 함몰되고

네 눈동자에 암각화처럼 새겨진

내 파리한 얼굴은

오늘 아침도 여전히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칡뿌리 같은 힘이다

가파른 어둠의 암벽을 거슬러

나의 흔들리는 영혼과

너의 반짝이는 눈빛이 만나

이 아침의 문을 열었으니

나의 품에 안긴 저 해를 오늘도 본다

누군가의 아침은 눈을 감는 일이고

누군가의 밤은 눈을 뜨는 일이고

살점을 헤는 바람도 떨림이더라

둥근 무덤의 이치란

백 년을 산 자의 하루와

하루를 산 자의 백 년이 만나

떠난 자의 허무만큼 애달픈 희망이 되는 것,

오늘도 하루의 일몰을 덮으며 날이 저문다

그래, 오늘도 이 하루를 살았다면

이번 생은 성공이다

 

 


 

 

권영준 시인 / 모든 고백은 묘비명이다

 

 

 아내가 그 일을 고백했을 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네 우리의 밤이 오르가즘에 오르지 못한다고 고백했을 때보다, 이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태연한 얼굴로 고백했을 때보다, 난 무척 편안히 아내의 고백을 들었다네 창밖으로 난 외길에는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손뼉을 치고 있었고, 우리가 만든 치즈 같은 자식은 아직 세상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다네 그 날 아내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건 예정된 무너짐인 것처럼 감정의 전라를 연출했던 것이네 난 아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외면하였고, 몇 벌의 눈물을 훌훌 벗어버린 아내는 해맑은 웃음 한 조각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네 난 치명적인 독설의 화살에 꽂혀 내 깊숙한 상처들이 쓰라리게 타오르길 소망했지만, 아내의 고백으로 연해 나의 영혼은 고스란히 살아 남아 연옥의 껍질을 덮어쓰고 말았다네 그 날 플라타너스 잎들은 캄캄한 날에도 은비늘처럼 부서져 내렸고, 이제 난 완벽하게 해체되어 우주 속에 숨쉬는 모든 예정된 무너짐을 위하여 술잔을 들어야 한다네

 

 모든 고백은 고백되는 순간 묘비명이 된다

 

 


 

권영준 시인

1962년 경북 영주 출생.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 1997년 10월 인천문인협회 신인대상 수상. 1998년 3월 월간 『현대시』 등단. 1998년 12월 시집『박물관을 지나가다』 『불의 폭우가 쏟아진다』. 시산맥 동인. 계간 『부천문단』 편집위원. 현재 인천학익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