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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윤이 시인 / 국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0.

김윤이 시인 / 국수

 

 

국숫발이 소쿠리 찬물에 부어지는 소리 들렸네

차―ㄹㄹ 불지 않고 물기 머금은 리을이 최초의 소리 같았네

잠귀로 들으니 밥쌀 이는 소리보다 더 가늘게 흐느끼는 그 면이 된 것도 같았네

국쑤 먹으련. 굶은 낯짝으로 내리 자면 맘이 편튼?

아뇨. 나는 몸 좀 아팠기로 쌀쌀맞게 말을 싹둑 자르고 노상 병상춘추 도시

거추장스런 세월 모르리 길게 누웠네

 

전생의 사랑방에서 그이가 히이야‚ 내 이름 불러 불과 함께 껐으리

재떨이에 담뱃불 바지직 이겼으리

그러면 난 날 싫어하셔 혼자 자실랑가, 아양도 간드러졌으리

 

혼몽으로 흐트러진 면인 듯 그이 민낯을 말아 쓸어안았네

내가 사는 한줌거리 머리칼과 피부를 빠져나가 경황없이 날 버리고 돌아온 마음이 찼네

차고 또 날이 많이 차 집안에 오한이 들었네 비로소 국수가 먹고 싶었네

 

쇠붙이가 없어 철판을 주워다 칼로 썼다는 도삭면(刀削麵)

그러나 먹어보고픈 최초의 사연 반죽덩어리

입마개에 걸려나온 듯이 국쑤 말고 밋밋한 국수라는 말을 곁들이면

정말 환하고 가늘은 면이 야들야들한 여자의 피부처럼 온갖 것 말쑥하게 벗고

서슬 퍼런 세상전쟁 같은 건 맹세코 모르리 나, 마냥 잊어버리고

불 그슬린 맨발인 듯 광막한 설원을 질러서라도 억분지(億分之) 일인 그일 찾으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여 백수를 잇게 하리

너만은 내게 그러면 안 되네 목 놓아 울지 않고 천수를 잇게 하리

잃어버린 마음 하나를 끓인 고열에서 최초로 건져 올리리

 

국수가 빚어지는 동안 안녕이 염려되어 그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최초의 사랑

그런 한물간 시간을 살고 싶었네

아아― 나는 바직바직 애가 밭고 탈날 노릇으로 반생을 앓아

만 궁여지책 내생을 이어 붙였네

전 생애 최초의 반죽덩어리 도로 썰며 다쳐도 좋아 하였네

정갈히 차리기 전 적셔다 놓고 적셔다 놓는 물고랑 소리로도

성큼 온 그가 기다리는 것이어서 하여 아흔아홉 좋이 될 물굽이인가

작심으로 뜯는 육고기 살점 말고 그만그만한 한가락 연이은 한가락,

국수로 연명하고플 따름이었네

 

 


 

 

김윤이 시인 / 등꽃이 필 때

 

 

목욕탕 안 노파 둘이 서로의 머리에 염색을 해준다

솔이 닳은 칫솔로 약을 묻힐 때 백발이 윤기로 물들어간다

모락모락 머릿속에서 훈김 오르고 굽은 등허리가 뽀얀 유리알처럼

맺힌 물방울 툭툭 떨군다 허옇게 세어가는 등꽃의

성긴 줄기 끝, 지상의 모든 꽃잎

귀밑머리처럼 붉어진다

염색을 끝내고 졸음에 겨운 노파는 환한 등꽃 내걸고 어디까지 가나

헤싱헤싱한 꽃잎 머리 올처럼 넘실대면 새물내가 몸에 배어 코끝 아릿한 곳

어느새 자욱한 생을 건넜던가 아랫도리까지 겯고 내려가는 등걸 밑

등꽃이 후드득, 핀다

 

 


 

 

김윤이 시인 / 스란

 

 

제자리에 빛을 물어다 실에 꿰어 구명정 떴습니다

당신 사라지고 몇 밤 자고 난 뒤같이

안쪽으로 깊어졌네요 한풀 꺾인 계절 마루, 이별 잦은 시절에서

채곡채곡 파고들어온 가슴팍 금사자수 무늬들

마음 몰아쳐 하늘 푼 어엿한 군락새 내 것이고요

한량없는 날갯짓도 내 것이네요

 

온 지상의 돌덩이 깨뜨려 떼놓아도 돌멩이

돌멩이 깨뜨려 떼놓아도 조약돌

 

인부들 다정 쪼을 거야 나는 못 품어 물 끼적이며 수놓겠지

생물의 소란 전연 없이도 막새 들이고 불붙는 금실 완성되느라 몸에 정 들이겠지

심정 한가운데 봄, 봄, 한수(寒水) 앞의 새가 재촉하여 새파란 하늘이겠지

 

새가 아길 물고 온다는 이야기가 반복될 거야

금족령 내린 계절에선 만상이 놓여날 수가 없는 거야

봄빛으로부터 눈길 거둘 때까지

초록빛 깨뜨려 초록빛 원소

 

세상은 내 앞에 주위에 언제나 넘치는 거야

애석만 기꺼이 내 것일 거야

핏빛 단 쇠붙이로 밝아오는 태양

금침인 듯 찰나로 터져오는 햇빛,

그걸 나는 빗장뼈에 하염없이 들이려

 

 


 

김윤이 시인

1976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및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및 동 대학원(현재-박사과정).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트레이싱페이퍼〉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독한 연애』 『다시없을 말』과 평론집 『메타버스 시대의 문학』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시힘〉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