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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희준 시인 /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0.

김희준 시인 /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TO. 루루와 나나에게

 

 안녕? 루루. 안녕? 나나. 8월은 어쩌다가 포도에게 빚을 지고 끝내 네게 오지 못했을까. 사탕 봉투에서 꺼낸 노란 앵무는 어디로 갔을까

 여름을 담보한 과일을 읊으며 새가 물고 가버린 날이 빗소리로 저미는 지금. 아삭,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우리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이야. 파과한 태양이 죽은 열기로 번지는 건 우리가 여름을 함부로 만져서야. 과일을 조심하고 있어. 이 계절은 활엽수와 가장 어울리는 뼈로 자라. 벌레가 갉아먹기 적당한 잎은 세 명의 탈레스가 비워둔 눈동자 같아. 비밀의 통로일지도 모를. 장수풍뎅이는 책갈피 몇 쪽에 있었지? 나는 궁금했어. 상자를 낳는다는 너의 이야기와 깨어나면 사라질 잠깐의 기억과 동의어에 대해. 여름이 오려낸 절기가 내릴 때 알았을까. 바구니의 멍과 우리의 금방이 슬퍼진다는 거

 나는 오늘 숨이 가쁜 금붕어의 물결무늬로 너를 써. 돌아서는 몸짓으로 쉼표를 만들고 첫울음과 비슷한 몸짓을 따라 태몽집을 엮지. 기억나지? 안팎의 기적을. 우린 어항에 금으로 번지자. 다음날 지구에 존재하는 나머지 생물이 이렇게 중얼거릴 거야

 아침

 유통기한이 지난 문은 그냥 닫아둘게. 수레국화가 흩어지는 그해 여름과 두 개의 초승달 노르트하우젠에서 멈춰버린 시계 역시. 바스러지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것들을 문지르면 들려. 유전자가 편집된 채 태어난 최초의 쌍둥이. 가위를 쥔 크리스퍼 베이비(CRISPR BABY)

 부정문의 아침은 싱그러워. 중심축을 그린 얼굴에 우는 애인이 생겼고 애인은 애인의 애인이거나 전 애인이거나 숨겼던 부등호로 기우뚱해. 비어버린 액자에 걸어뒀던 생경한 얼굴, 서쪽에서 백팔 번의 종이 울려. 오직 루루가 나나를 나나가 루루를 되찾기 위해. 격자무늬를 수혈받아야 해. 너의 몸엔 별 무더기가 숨어 있지. 소름의 개수를 놓쳐버린 건 모두 정글짐 때문이야. 그러나 나나, 사랑스러운 말을 연습할게. 우리가 우리라는 걸 알게 되도록. 아픔은 배우지 않아도 잘 느껴져서 나나는, 루루는

 정교한 탯줄을 빨아들이는 우리의 다음 생

 나란히 웃었던 그 날이 너무 그리워. 올리브 동산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 답장엔 소행성 09A87E의 행방을 꼭 알려줘. 안녕! 부디 안녕!

P.S 엄마의 안부가 궁금할 땐 내 입술을 빌려 가.

계간 『시산맥』 2020년 겨울호 발표

 

 


 

김희준 시인(1994.~2020.)

1994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 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재학 중(현대문학전공)이었음.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 유고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 유고산문집 『행성표류기』(난다, 2021)가 있음. 제14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 상,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 창작준비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2020년 7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