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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박은경 시인 / 못 속이는 이야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1.

김박은경 시인 / 못 속이는 이야기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벽에서 못이 떨어졌다면 돌이킬 수 없이 휘어져 있다면 못도 속도 휘어졌겠지 다정을 다 주면 다정을 잃게 된다 파고드는 아이를 안고 업다 굳어버린 지친 몸처럼 고스란히 운명의 각이 잡히게 된다 불안과 불신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낙관했겠지 무모하게 희망했겠지 기를 쓰며 휘둘렸겠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우리는 없었겠지 검고 좁은 못 구멍의 전후로 영원토록 적나라한 미래라니 가능한 모든 차원으로 달라붙는 그것은 이종의 피 혹은 뼈, 가족 아니 가죽 달라붙어 거두고 가두니 안거나 안지않거나 갈 수 없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 수 없다 문이 없다진득한 얼룩과 냄새가 왜겠니 더러운 게 아니라 가난한 거야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없는 거야 알려주고 싶지 않아 주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고통일 거야 내일에게도, 가장 안쪽에 먼저 죽은 것이 있다 죽은 것으로 가득해 빈틈이 없다 더이상 살 수 있는 것이 없다 살아 있는 것이 없다 구멍마다 외눈박이 아이들 서글픈 꿈들 믿을 수 없을 만치 작고 동그란 어깨의 형태 그럼에도 속절없이 다녀가다니 좁은 방 벽에 늘어가는 못 자국처럼 기웃기웃 안부라도 전하는 건가 빛을 향하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라 천지간 꽃향에 취해 걷다보면 널브러진 꽃가지들이 수습 못한 팔다리 같아 꽃을 잃은 나무마다 비틀거리는 여인 같아 으깨진 꽃물은 피눈물 같아 빈 벽의 빈 구멍들을 차마 볼 수 없는데

 

-시집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문학동네, 2020)

 

 


 

 

김박은경 시인 / 출사탕기(出砂糖記)

 

 

나를 향해 고개 돌릴 때 꽃송이들 무더기로 피어나고

숨이 덥고 앞이 안 보이고 도망가자

한숨 내쉴 때 다시 고개 돌릴 때 둘러싼 꽃들 무너지고

모세의 그날처럼 바다는 등뼈를 곧추세우며 갈라지니

왼편의 간절함과 오른편의 덧없음이 만나고

안간힘으로도 물거품들 부풀다 사그라지니 도망가자

손잡으면 파도는 두 손을 싸고돌고

안으면 파도는 두 몸을 싸고돌고

그래도 좁힐 수 없는 틈이 남으니 시간이 없어, 도망가자

서로의 결핍을 파고들며 마주 선 시간을 관통한다 해도

도망가자 순식간에 전 생애가 이해되니

이대로 아무것도 아니래도 좋아

좋아 움직이지 마 숨도 쉬지 마

무엇이 멀리서 당긴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그렇지?

두 눈이 내려앉는 깃털처럼 웃는다

날아가는 깃털 잡을 수 없는 깃털

음성은 귀를 세우고 눈을 채우고 바다를 채우니

높아가는 수면 위로 흰 손가락 동그라미

점점 작게 더 작게 잠시 났던 길은 흔적도 없다

이 바다는 보름과 그믐마다 애타도록 천천히 제 속을 드러내지만

예언자도 시나이(Sinai) 산도 보이질 않으니

도망가자 달 바다 당신이 출렁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더는 예전 같지 않겠지

아무 일 없는 물고기 갈매기 고래들 사라진다

아름다운 수식처럼 처음과 끝이 들어맞는다

나 차라리 그대를 달게 삼켰으면 삼켜졌으면

겹쳐진 물거품처럼 겹눈처럼 하나로 보고 말하며

감쪽같이, 도망가자

 

 


 

 

김박은경 시인 / 지금의 당연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알아 전혀 모르겠다니 그건 모르겠다

사랑하는 걸 사랑하고 미워하는 건 미워해

좋은 게 좋은 거지 싫은 건 싫다 예쁜게 예쁘고

웃긴 게 웃기고 아픈 건 아프지 슬픈 게 슬프고

재미있는 게 재미있어 모든 면에서 그렇지만

어느 면으로 더욱 그래 죽은 듯 자는구나

아니 죽은 사람을 본적 없어 어린 짐승처럼 순해 보여

아니 짐승을 키운적 없다 가슴에 눈을 묻으면 부드럽다

귀를 대면 어지러워 살아야 아름다운 건데 너는 그걸 모르고

나는 알 것 같지만 고백은 하지 않는다

너무 가난해서 사람이 없다고 아니 사랑이 없어서 가난하다고

그러나 사랑으로부터 자꾸 달아나면서

사랑이 사랑을 어쩔 수 없듯이 너도 너를 어쩔 수가 없으니까

봄날의 너를 알기에 겨울의 너를 알아보았다

웃는 너를 알기에 우는 너를 알아보았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었지

뒤섞인 음성 속에서도 너의 것만 확연했지

귀신이거나 세상이 아니거나 지금은 아니니까

안을 수 있을 때 한 번만 더 안아봐야지

서두르자 너무 좋아 가짜 같겠지 영원해 과거 같겠지

포옹이 깨지기 전에 폐허가 무너지기 전에 울면서 울고 싶고

죽어가며 죽고 싶다니 잊지 말자던 고백은 잊자

결심을 위한 결심을 하자 부디 나의 용서를 용서해

 

 


 

김박은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대, 홍익대 산미대학원 졸업. 2002년《시와 반시》에〈감전〉외 4편을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와 산문집 『홀림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