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원규 시인 / 달빛을 깨물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1.

이원규 시인 / 달빛을 깨물다

 

 

살다 보면 자근자근 달빛을 깨물고 싶은 날들이 있다

밤마다 어머니는 이빨 빠진 합죽이였다

양산골 도탄재 너머 지금은 문경석탄박물관

연개소문 촬영지가 된 은성광업소

육식 공룡의 화석 같은 폐석 더미에서

버린 탄을 훔치던 수절 삼오십 년의 어머니

마대 자루 한가득 괴탄을 짊어지고

날마다 도둑년이 되어 십 리 도탄재를 넘으며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청상의 어금니가 폐광 동바리처럼 무너졌다

 

하루 한 자루에 삼천 원

막내아들의 일 년 치 등록금이 되려면

대봉산 위로 떠오르는 저놈의 보름달을

남몰래 열두 번은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봉창 아래 머리맡의 흰 사발

늦은 밤의 어머니가 틀니를 빼놓고

해소 천식의 곤한 잠에 빠지면

 

맑은 물속의 환한 틀니가 희푸른 달빛을 깨물고

어머니는 밤새 그 달빛을 되새김질하는

오물오물 이빨 빠진 합죽이가 되었다

 

어느새 나 또한 죽은 아버지 나이를 넘기며

씹을 만큼 다 씹은 뒤에

아니, 차마 마저 씹지 못하고

할 만큼 다 말한 뒤에 아니, 차마 다 못하고

그예 들어설 나의 틀니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어머니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장례식 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털신이며 속옷이며 함께 불에 타다 말았을까

지금도 무덤 속 앙다문 입속에 있을까

 

누구는 죽은 이의 옷을 입고 사흘을 울었다는데

동짓달 열여드렛날 밤의 지리산

고향의 무덤을 향해 한 사발 녹차를 올리는

열한 번째 제삿날 밤이 되어서야 보았다

기우는 달의 한쪽을 꽉 깨물고 있는, 어머니의 틀니

 

 


 

 

이원규 시인 / 돌아보면 그가 있다

 

 

돌아보면 그가 있다

쪼그려 앉아 담배 피우는 사내

바닷물 다 마셔봐야 짠맛을 알겠냐는 듯

씨익 웃는 그가 있다

 

늘 앞서던 황인종의 눈빛 속에

20세기의 꿈은 저물어가지만

불경 속으로 들어가는 마르크스

불경 속에서 걸어나오는 마르크스

돌아보면 언제나 그가 있다

 

흐린 날의 헌책방

그의 유서 속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그는 나의 렌즈이자 암실

빛의 날들이 뚜렷이 인화되지만

일요일에 태어나 일요일에 죽은

그와의 완충지대엔 낙엽 지느라 시끄럽다

 

추모한다는 것

무정란을 품고 산다는 것

돌아보면 꽃의 이마가 따스하다

그의 그림자 한없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이원규 시인

1962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 경제학과 졸업.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1989년 <실천문학>에 연작시 “빨치산 아내의 편지‘ 15편을 발표하며 활동 시작. 시집 『빨치산의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시사진집 『달빛을 깨물다』 등과 포토에세이 『나는 지리산에 산다』 등을 출간. 2021년 제16회 신동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