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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규 시인 / 밤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1.

김광규 시인 / 밤눈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김광규 시인 / 봄놀이

 

 

아스팔트 길에서 골목길로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 들어간다

전봇대 옆길에서 한길로

고양이 새끼들처럼 후다닥

뛰어 나온다

조그만 자전거를 한 대씩 타고

자동차들 사이로 쏙쏙

누비고 다니며

아슬아슬하게 숨바꼭질 벌인다

마을버스를 급정거시키고

두부 장수 오토바이와 하마터면

정면충돌을 할 뻔한다

발갛게 얼굴이 상기된 꼬마들

온갖 걱정 아랑곳없이

어른들의 노곤한 발걸음 사이로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개구쟁이들

그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뒤돌아보며 앞을 내다보며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살아갈 필요도 없이 그들은

온몸으로 놀고 있는 봄이다

 

 


 

 

김광규 시인 / 여름 엽서

 

 

월악산 등반을 떠난 사내들과

조령 삼관문을 넘어간 여자들

모두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새소리 벌레 소리 한데 어울려

짙푸른 숲냄새 뿜어대는 오후

노인들은 나무 그늘에서 바둑을 두고

아이들은 풀밭에서 메뚜기를 쫓아다니네

신문도 보지 않고

뉴스도 들을 수 없는 곳

전화도 없는 외딴 마을에 파묻혀

귀찮은 일들 깡그리 잊어버리고

목신(木神)처럼 보낸 3박 4일을

행여 탓하진 말게

부러워할 것도 없네

투항하는 빨치산 몰골이 되어

곧 서울로 돌아갈 터이니

 

-시집 <아니리>에서

 

 


 

 

김광규 시인 / 그저께 보낸 메일

 

 

오늘은 어제의 다음 날

어제는 예스터데이

비틀스 노래 속에 날마다 되살아나는

어제는 오늘의 바로 전날

독일어로 gestern/ 게스테른

그저께는 어제의 바로 전날

vorgestern/ 포어게스테른

영어로는 좀 길지만 the day before yesterday

그 긴날 저녁때도 원고를 고쳐쓰고

와인 한잔 마셨던가

가물거리는 그저께 기억

수첩을 꺼내보지 않으면 누구를

만났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네

손을 뻗치면 곧장 닿을 듯 가까운

어제의 하루 전날

안타깝게도 되돌릴 수 없네

그저께 보낸 메일

 

-시집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 지성사, 2023

 

 


 

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및 同 대학원 독문과 졸업.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데뷔. 1983 <귄터 아이히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등.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과  2006년도 독일 언어문학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상과 2008년도 이미륵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