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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무지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17.

최승호 시인 / 무지개

 

 

흰 대머리바위들을 적시며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더니

인왕산 위에

무지개 떴다

 

동물원 우리에서 보았던

앞뒤가 영 딴판인 공작새

부채 같은 꼬리 깃털들 떠오른다

 

굳이 새삼스럽게 말하자면

내 몸 안에도 무지개가 있는데

다름아닌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나의 무지개

 

찬연할 때도 있다

음울할 때도 있다

 

 


 

 

최승호 시인 / 오후의 익사체

 

 

흐린

물 속에서 며칠

넥타이를 맨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와이셔츠에 흙물이 들었다.

우렁이 껍질 같은 눈,

헤벌어진 입이

송장의 미소를 흘리고

혁대는 뚱뚱한 복부를 조르고 있다.

발기는 끝이 났다.

발기로 인한 방황, 초조, 헐떡거림 그리고

허망함도 마무리가 되었다.

콧등에 붙은 우렁이 새끼가 보인다.

두 팔은 늘어져 있다.

뜻밖의 푸짐한 공짜 먹거리를 만난 것처럼

게아재비, 물장군, 똥방개, 소금쟁이들이

오후의 익사체에 몰려 들었다.

그들은 다리를 움직인다.

그들은 조그만 입으로 물어뜯으려고 애쓴다.

몇시나 되었을까.

콧구멍 속으로 우렁이 새끼가 들어간다.

 

-<창작과 비평> 2001년봄

 

 


 

 

최승호 시인 / 에스컬레이터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부채가 큰 부자이거나

부채도 없이 가난한 사람이거나

천천히 혹은 빠르게 죽음에 인도되기까지

올라가고 또 내려오며

펼쳐지고 다시 접히는 계단들.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궁둥이가 큰 바지를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밑에서 쳐다보거나

고개 돌려 저 밑계단의 태아들을 굽어보거나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것은 공짜이다.

서두를 게 하나 없다 저승열차는

늦는 법이 없다, 막차가 없다.

 

 


 

 

최승호 시인 / 겨울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보다 길다

 

 

긴 겨울 우리는

황소바람 앞에서 문풍지를 바른다

질화로를 껴안고 고구마를 뒤적인다

 

식어가는 굴뚝 곁에서 잠자는 굴뚝새

긴 겨울 재강아지는

식은 아궁이에서 재를 털며 나온다

 

겨울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보다 길다

 

늑골에 냉기를 내뿜는 은산철벽들

빈 골짜기에 휘몰아치는 눈보라

 

긴 겨울 겨우살이는

겨우겨우 추위를 견디고 있다

 

 


 

 

최승호 시인 / 허물

 

 

누구는 허물을 벗고 하늘로 오른다지만

나는 다르다.

 

몸이 벗어야 할 허물이 없다는 것이

절망은 아니다.

허물덩어리로 살다가

허물로 늙어 죽는 것이

절망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몸 전체가 허물이고

허물이 바로 온몸이기에

구렁이처럼 허물을 벗는 것은

미끄럽게 꿈틀거리는 세월이지

내가 아니다.

 

세월의 뱀비늘로 붙어서 번뜩이는 자,

세월의 사족으로 세월을 따라가는 자,

사족에도 뱀비늘에도

허물의 슬픔은 있으리.

 

 


 

 

최승호 시인 / 꽃 피는 죽음의 나무

 

 

수음할 줄 아는 나이면 몸 안에

죽음의 나무도 화사하게 꽃 피는 법,

청춘의 꽃비린내 풍기다 백발되는

정충들 속에 죽음의 씨앗을 뿌려놓고

자라나는 죽음의 나무는

뿌리를 생식의 根에 박고 자라난다.

그 무성해진 죽음의 잎사귀들이

검버섯.

황혼 속에 서 있는 검버섯 노인은

목이버섯 돋은 감나무를 생각나게 한다..

서리에 우수수지는 잎들,

잘린 꿈의 흔적으로

가슴에 박혀 있는 옹이들.

내 나이테는 죽음의 나이테,

죽음은 밖에 있지 않다.

죽음의 나무가 앙상한

몸을 꾸부정하게 뒤틀며 넘어지는 날은

내 몸이 넘어지는 날.

벌목할 수 없는 죽음의 나무

그 뿌리 밑으로

바닥 없는 저승의 강이 흐른다.

나 죽으면

죽음의 나무도 죽고

검은 물이 증발하며

귀신들도 말라붙는

저승의 강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춘천교육대학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 산문집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