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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난희 시인 / 호미꽃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13.

이난희 시인 / 호미꽃

 

 

 구부러진 길에 꽃이 있다. 한 사람만 알고 있다. 갈라진 벽에 햇볕 들어서자 표정이 환해진다.

 

 벽 속의 습기가 키워 낸 과꽃 한 송이

 자루 빠진 호미가 들고 있다.

 

 어쩌다 여기 뿌리를 내렸나. 제 살점 떨어지는 줄 모르고 호미는, 꽃대를 추슬러 업는다. 곤히 잠을 자던 꽃잎이 호미 품을 파고드는 동안 등을 토닥이던 바람의 얼굴 붉어진다.

 

 검버섯 핀 노인의 손이 호미를 누른다. 떨어진 녹 부스러기 평생을 파고들던 흙바닥을 품는다. 노인은 속을 긁어 대던 호미의 기억을 거름처럼 쓸어 모아 벽 틈새로 밀어 넣는다. 오므린 손금 안에서 빠르게 노을이 쏟아진다.

 

 뒤꿈치를 든 꽃의 뿌리가 호미에게로 기울어진다. 탁탁, 손을 털고 일어서는 굽은 허리가 가벼워진 햇볕을 업고 뒤란으로 사라진다.

 

 아직 늙지 않은 과꽃 향기 무료한 그림자를 깨문다.

 

 


 

 

이난희 시인 / 첫, 눈(雪)의 시간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맨 처음 이야기

알몸의 나무를 더듬는 손

 

어서 와

여긴 너무 멀어 따뜻하지

 

마른 입술이 달의 한쪽 팔을 베고 눕는다

아직 사랑하는 법을 몰라

마른 잎이 두근거린다

 

사방 적막하고

어떤 밑그림도 그리지 못한

우린 울지 않는다

 

너무 다정한 비밀들

어둠을 들추고 달이 사라질 때 우리는

맨 처음 기억으로 겨울을 살아간다

 

 


 

 

이난희 시인 / 중심

 

 

문짝 없는 변소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위구르 여인

아무런 흔들림 없이

속눈썹만 열었다 닫았다

출입구 정면을 똑바로 지키고 앉아 있었네

얼굴이 시뻘겋도록 힘을 주고 나서야

부드럽게 휘어지며 몸을 빠져나온

여인의 중심

잠깐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중심에 닿기 위해

불끈 두 손을 움켜쥐었을 그때도

붉은 낯빛의 저 위구르 여인처럼

얼굴 붉혔을 것이네

왼쪽 오른쪽, 기우뚱 거리지 않기 위해

양다리가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때론 눈물이 먼저

중심을 통과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네

누군 세상의 중심이 궁금해

변소에 앉아 신문을 뒤적인다는데

누군 모락모락 김나는 밥 한 덩이가

꿈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빠져나갈 때

잘 소화된 웃음을 두 손에 담았을 것이네

위구르 여인처럼 쪼그리고 앉아

막막했으나 흔들려도 좋았을

첫 걸음마를 생각하네

맨 처음 나를 통과한

내 몸의 중심을 부드럽게 매듭지었을

어머니의 어머니

감쪽같은 두 손을 생각하네

 

-시집 <얘얘라는 인형> 중에서 -

 

 


 

 

이난희 시인 / 유물

 

 

 채제공*의 후손이 수원화성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했다는 그날

 우연히 집안을 정리 중이었습니다.

 정리할 때마다 기준은 달라집니다.

 이번엔 만약 내가 세상에 없을 때를 염두에 둔 날입니다.

 사람의 때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릴 때마다 '나'는 흐릿해지고 물건의 의미는 환해지기도 합니다.

 

 버려야 할 책을 고르다

 깊은 잠에 빠진 상수리나무 잎과 마주칩니다.

 

 안녕······안녕······

 

 시간을 짚어보니 40여 년이 지났습니다

 엽서를 대신했던 나뭇잎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빈집 같은 그곳에서

 나의 무관심을 베개 삼아 자고 있었습니다.

 

 나조차 기억 못 할 나의 유물이 될 뻔했죠

 

 어느 생을 거쳐 잠시 내 것이 된 옛 서적은 전문 학자에게

 개화기 인쇄물 한 점은 관계기관으로 보냈습니다

 

 나의 마지막은

 우체국이나 박물관에 가던 날의 기분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옛사랑의 편지를 전해주던 우체국과

 질문 없이 유물의 말에 경청할 수 있는 박물관이

 이 세계에 있어 좋습니다

 

 아무튼 정리를 하는 날은 무엇이든

 오늘 처음 알게 된 듯 자꾸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 79세)은 조선시대 문화 중흥기를 이끈 정조대왕을 정치적으로 보필한 명재상으로 수원화성 축성 책임자이기도 했다.

 

-『시사사』 2021-겨울(108)호

 

 


 

 

이난희 시인 / 모형 집

 

 

 오늘도 벽에 걸린 인형의 입에 슬며시 사람의 말을 새겨넣는다

 

 그리번거리며 들어서는 햇살의 눈이 액자 속 자작나무로 옮겨 간다

 

 안 보이는 나무의 뿌리가 미지를 찾아 여행하는 얘기를 살짝 열린 문이 듣는다

 

 누가 더 많은 감정을 숨길 수 있을까, 장식품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모호하다

 

 가지런히 묶인 커튼은 펄럭이지 않는다고 사람이 천장에 낙서를 한다

 

 가짜 꽃이 창문을 내다보며 웃음을 쏟아 낼 때, 유령처럼 떠다니는 마음이 뒤꿈치를 들고 뛰어내린다

 

 나를 흉내 내는 이 집을 무너뜨리 줘 배웅이 없는 집은 소용이 없어

 

 얼굴 없는 무늬를 찢고 벽 속의 새가 날아간다

 

 들어갈까

 

 눈이 마주치자 좀 전의 집이 사라진다

 

 


 

 

이난희 시인 / 박석薄石에 빗물 고일 때

 

 

문정전을 앞에 두고 회랑에서 멈춘다

아무도 살지 않는 걸 알면서도

저곳을 들여다보면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칠 것만 같다

 

하나, 둘...느린 호흡으로 격자무늬 창살을 센다

숫자를 세는 일이 빈 숟가락을 입에 넣는 것 같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때도 그렇다

 

장수말벌에게 애절한 사과 편지를 보낸 소년도 그랬을 것이다

공격을 하기에 맞섰을 뿐인데, 그렇게 죽을 줄 몰랐을 테니

 

궐 안의 모든 것이 빗소리를 밟고 배회 중이다

괴괴하고 썰렁한 공기가 서로를 어루만진다

 

목이 마르구나......

 

임오화변의 못질에 섞여

느린 유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소맷돌 구름문 한가운데를 깊이 찌른다

 

이국의 여행자가

박석 사이 웅덩이를 향해 셔터를 누른다

 

저이는 몸을 숙인 채 오래도록......

지극햇다

 

번쩍, 번쩍

몇 차례 플래시가 터진다

그 사이

눅누가 빗소리를 핥아 마신다

 

쌀 냄새 가득했을 그날의 뒤주는 어디에 있을까

하명이 내린 전각의 앞뜰은 묵묵부답이다

 

밑줄 친 말이 떠돌다 길을 잃는다

여러 갈래 해석이 입을 막고 빈 앞뜰에 채워진다

 

- 임오화변: 1762년 (영조38) 임오년에 발생한 정치적 화변, 사도세자는 창경궁 문정전 앞뜰에서 뒤주에 갇힌 지 8일째에 숨을 거두었다 "......20일 오후 세 시쯤 폭우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치니, 경모궁께서 평소 그것을 두려워하시더니. 이 무렵 돌아가시니라. 나는 차마차마 그 모습을 헤아리지 못하니......" - 한중록 중

 

- <현대시> 2021, 12월호

 

 


 

이난희 시인

1961년 충북 충주 출생. 인천 거주. 2010년 9-10월호《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현재 『학산문학』편집위원. 시집 <얘얘라는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