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49217

하기정 시인 / 구름의 화법 외 10편 하기정 시인 / 구름의 화법 ​​ ​ 구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그러니 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 거야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 2023. 5. 31.
이면우 시인 / 봄밤 외 3편 이면우 시인 / 봄밤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 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 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이면우 시인 / 버스 잠깐 신호등에 걸리다 큼직한 손바닥에 상추 펼치고 깻잎 겹쳐 그 위에 잘 익은 살코기 얹고 마늘 된장 쌈 싸 한입 가득 우물대는 사내 보는 일 그것참 흐뭇하오 맑은 술 한잔 약봉지 털듯 톡 털어 넣고 마주 앉은 이에게 잔 건네며 껄껄대는 사내 보는 일 역시 흐뭇하오 그 곁에 젊은 여자, 호 불어 넣어 준 제 아이 오물대는 입을 그윽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소. 유리벽 이쪽에서 나도 저리 해보리라 마음먹은 저녁은 .. 2023. 5. 31.
최동호 시인 / 수원남문 돌계단 햇살 최동호 시인 / 수원남문 돌계단 햇살 남창 초등학교 시절 청소당번이 된 우리는 다람쥐 장난하듯 물을 뿌리고 먼지를 털며 다락과 돌계단으로 오르내렸다. 잠시 돌계단에 앉아 우리는 곱은 손을 내밀어 겨울 햇살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에는 차갑지만 한줌의 햇살이 투명한 물과 같이 고였다. 물고기를 잡듯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던 그날 이후 돌계단에서 빛났던 한줌의 햇살은 내 영혼의 맑은 물이 되었다. 세상 바다 멀리 나갔을 때 거센 폭풍우 불어 닥쳐 흔들릴 때마다 마음속의 그 우물에 담긴 햇살이 항상 초심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월간 『쿨투라』 2022 년 1월호 발표 최동호 시인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현대문학 박사).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부문.. 2023. 5. 31.
유문호 시인 / 기러기 외 2편 유문호 시인 / 기러기 저 새들은 어디서 오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세상 저 끝에서 온다고 말해주었다. 저렇게 떼지어 어디 가는 거냐고 또 물었다 세상 저 끝으로 간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어디가 세상 끝이냐고, 이번엔 정색하고 올려다 본다 잠깐 궁리 끝, 기러기 내려앉는 곳이겠지, 하고 둘러 댔다. 호숫가 외딴 오두막 가까이 키보다 높은 갈대들 손 저어 쉬어 가라고 기러기 부르는 곳 저녁 막 먹고 나란히 서서 고개 젖혀 하늘 보며 밭고랑에 오줌발 쏘던 깊은 겨울. -시집 유문호 시인 / 길들이 뒤척거렸다 길들이 뒤척거렸다 바람 불어 마른 길들이 밤새 나를 찔렀다 가만히 길 하나 주워들자 썩은 나무등걸처럼 툭 부러졌다 먼지처럼 날리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걸음들 먹먹한 표정으로 서서 나는 내 삶의 어느 한 부분도.. 2023. 5. 31.
김박은경 시인 / 못 속이는 이야기 외 2편 김박은경 시인 / 못 속이는 이야기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벽에서 못이 떨어졌다면 돌이킬 수 없이 휘어져 있다면 못도 속도 휘어졌겠지 다정을 다 주면 다정을 잃게 된다 파고드는 아이를 안고 업다 굳어버린 지친 몸처럼 고스란히 운명의 각이 잡히게 된다 불안과 불신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낙관했겠지 무모하게 희망했겠지 기를 쓰며 휘둘렸겠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우리는 없었겠지 검고 좁은 못 구멍의 전후로 영원토록 적나라한 미래라니 가능한 모든 차원으로 달라붙는 그것은 이종의 피 혹은 뼈, 가족 아니 가죽 달라붙어 거두고 가두니 안거나 안지않거나 갈 수 없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 수 없다 문이 없다진득한 얼룩과 냄새가 왜겠니 더러운 게 아니라 가난한 거야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없는 거야 알려주고 싶지 않아 주.. 2023. 5. 31.
신동집 시인 / 오렌지 외 2편 신동집 시인 / 오렌지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신동집 시인 / 하일명상(夏日瞑想) 노년은 하.. 2023. 5. 31.
김왕노 시인 / 푸른 뱀 외 1편 김왕노 시인 / 푸른 뱀 수도 꼭지를 틀면 쏟아지는 물이 뱀이라는 생각... ... 팔당 어디 출렁이던 푸른 뱀이 여과지를 거쳐 여기저기로 달려와 수천수만 톤 쏟아진다는 사실 수돗물은 원죄로 똬리를 틀고 울던 날을 접고 참회의 뱀으로 우우 몰려와 쏟아지는 푸른 뱀인 것 뱀이 된 수돗물로 죄의 손을 씻으면 나도 누군가에게 흘러가 물뱀이든지 물이든지 그의 가문 가슴이나 텃밭을 적시고 아아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팔당의 물을 푸른 뱀으로 바라보았다는 것, 팔당을 거쳐 온 푸른 뱀이 수도꼭지로 쏟아진다는 생각, 이 끊을 수 없는 연대로 나도 원죄의 뱀처럼 울어보는 것, 나도 이제 속일 수 없는 나이라는 것 수도꼭지를 트니 푸른 뱀이 쏟아진다. 제발 물의 독니를 세워 나를 단죄하기를, 나의 삶이란 숨 쉬는 것 빼고.. 2023. 5. 31.
권영준 시인 / 고정관념에 대하여 외 2편 권영준 시인 / 고정관념에 대하여 1 아침에 일어나니 내 머릿속에 이상한 혹이 하나 만져졌다 굳은살처럼 딱딱하게 응고된 이 덩어리는 언제부터 내 생각 속에서 조금씩 돋아났던 것일까 망막의 유리문을 통해서만 간신히 보이는 그 덩어리의 뿌리, 뿌리가 하도 깊어 수술로도 제거할 수 없는 그것을 나는 맹장처럼 늘상 달고 다녔던 것이다. 2 생각하면 그것은 처음에 천평처럼 여리고 사납게 흔들리다 그 위태로운 흔들림이 한쪽으로 기울어 티눈처럼 돋아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의 더께가 채곡채곡 쌓여 실핏줄이 뻗어 들어가고 생각이 담겨 내 몸의 장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팔처럼 뒤틀면 아프고 살갗처럼 꼬집으면 멍들고, 천연덕스레 남의 육체에 기생하며 땅 위의 온갖 흐린 눈빛들 틈새에서 난해한 잠언이 되어 선한 생각들을.. 2023. 5. 30.
김희준 시인 /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김희준 시인 /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TO. 루루와 나나에게 ​ 안녕? 루루. 안녕? 나나. 8월은 어쩌다가 포도에게 빚을 지고 끝내 네게 오지 못했을까. 사탕 봉투에서 꺼낸 노란 앵무는 어디로 갔을까 ​ 여름을 담보한 과일을 읊으며 새가 물고 가버린 날이 빗소리로 저미는 지금. 아삭,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우리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이야. 파과한 태양이 죽은 열기로 번지는 건 우리가 여름을 함부로 만져서야. 과일을 조심하고 있어. 이 계절은 활엽수와 가장 어울리는 뼈로 자라. 벌레가 갉아먹기 적당한 잎은 세 명의 탈레스가 비워둔 눈동자 같아. 비밀의 통로일지도 모를. 장수풍뎅이는 책갈피 몇 쪽에 있었지? 나는 궁금했어. 상자를 낳는다는 너의 이야기와 깨어나면 사라질 잠깐의 기억과 동의어에 대해. 여름이.. 2023. 5. 30.
김윤이 시인 / 국수 외 2편 김윤이 시인 / 국수 국숫발이 소쿠리 찬물에 부어지는 소리 들렸네 차―ㄹㄹ 불지 않고 물기 머금은 리을이 최초의 소리 같았네 잠귀로 들으니 밥쌀 이는 소리보다 더 가늘게 흐느끼는 그 면이 된 것도 같았네 국쑤 먹으련. 굶은 낯짝으로 내리 자면 맘이 편튼? 아뇨. 나는 몸 좀 아팠기로 쌀쌀맞게 말을 싹둑 자르고 노상 병상춘추 도시 거추장스런 세월 모르리 길게 누웠네 전생의 사랑방에서 그이가 히이야‚ 내 이름 불러 불과 함께 껐으리 재떨이에 담뱃불 바지직 이겼으리 그러면 난 날 싫어하셔 혼자 자실랑가, 아양도 간드러졌으리 혼몽으로 흐트러진 면인 듯 그이 민낯을 말아 쓸어안았네 내가 사는 한줌거리 머리칼과 피부를 빠져나가 경황없이 날 버리고 돌아온 마음이 찼네 차고 또 날이 많이 차 집안에 오한이 들었네 비로.. 2023. 5. 30.
천외자 시인 / 숨겨둔 집 외 2편 천외자 시인 / 숨겨둔 집 꼭 돌아와야 하는 소풍은 아니다 가서 늦어져 이쪽에 불이 켜질 때 아무 생각 말고 그 등불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잠들어버리는 그런 소풍* 갈 곳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집 경북 안동시 길안면 산하리 붉은 패랭이꽃이 핀 강변 강둑을 따라 어린 아카시아 관목의 잔가지와 잔 돌을 깔아서 만든 집이 있다 당분간은 도요새와 강바람과 물안개에게 맡겨 둔 집 거기서는 내 키가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이 보이지 않고 내 발가락이 보이지 않고 내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고 내 추위와 슬픔마저 보이지 않던 크고 따뜻하고 깊숙한 집 아침마다 그곳으로 간다 작고 초라한 이삿짐 슬픔 한 줌과 햇살 한 홉을 태워 내 집 처마에도 불을 켜고 싶다 어쩌면 거기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상의 많고 많.. 2023. 5. 30.
박지우 시인 / 우산들 외 1편 박지우 시인 / 우산들 비는 모든 존재의 키를 키운다지 ​ 어쩌면 인간의 내면으로 파고들기 위해 내리는지도 몰라 ​ 꽃을 탐하는 비의 건널목으로 산란하는 우산 하나 , 둘 그리고 우산 셋 ​ 물비린내 날리는 여자가 위태롭게 걸어간다 화려하게 치장한 나비처럼 알록달록 동그랗고 투명한 얼굴들 목줄 풀린 개가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울퉁불퉁 휘청거리는 비 , 당신을 잃어버리겠어요 ​ 나 , 비 , 나비를 꿈꾸는 노랗고 빨간 지느러미 ​ 비의 몸뚱이들 ​ 후드득 후드득 앞 다투어 뛰어내리는 오독의 문자들 ​ 백색소음에 출근길이 저만치 달아난다 ​ 시집 『우산들』(한국문연, 2023)수록 ​ 박지우 시인 / 회화나무 그늘 아래 은유는 수직적 도약이다 야콥슨의 말이 뒤뚱거린다 비에 젖기도 하고 고양이 앓는 소리를 내기.. 2023.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