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8367

박은영 시인 / 귀소본능 외 1편 박은영 시인 / 귀소본능 종로 낙원상가, 비둘기들이 땅으로 내려왔다 새의 낙원은 하늘이 아니라 종로구이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왔을 때, 버스정류장 앞에서 옷자락을 퍼덕이던 서른셋 여자의 동공은 흔들렸다 하필 , 여름이었고 나는 복숭아맛 하드를 사달라고 칭얼거렸으니 당신 눈에 비친 세상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엄마가 양푼에 찬밥을 퍼 담아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쓱 비벼먹을 수 있는 골목으로 돌아간 것은 본능이었나 날갯죽지가 뻐근하도록 얻어맞은 비만한 몸을 이끌고 낙원의 중심으 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율되지 않은 말들이 새어나왔다 이년의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인 게지 눈을 부릅뜨고 비벼먹던 그날의 엄마보다 늙고 비만한 나는 비둘기 발목에 쪽지를 묶는 것처럼 파스를 붙인다 팔자걸음을 걷는 음표들 .. 2022. 8. 31.
김용옥 시인(남) / 춘양역에서 외 2편 김용옥 시인(남) / 춘양역에서 다음 열차 그 기다림의 시간 어둠에 묻힌 작은 시골역 대합실 외줄기 홈에는 하얀 눈이 쌓이는데 어떤 이는 웅크린 채 잠을 청하고 어떤 이는 낡은 신문지를 뒤적이고 나는 낯선 외지의 풍경을 하나하나 서리낀 유리창에 새겨 보고 모두들 아무 말도 내놓지 않아도 쌓이는 눈꽃에 서로의 안부 오늘의 사연들을 애틋한 옛날이야기처럼 피워내고 있다. 창밖에는 간간이 바람이 불고 여전히 하얀 눈이 쌓이고 우리 모두는 다음 열차 그 기다림의 시간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 희미한 전열구 밑에 삶의 한순간 기다림의 의미를 짓고 있는 사람들 졸고 있는 사람도 저렇게 쿨룩이는 사람도 시장기에 지친 사람도 기적이 울리면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길로 그래서 지금의 시간을 버려야 한다. 산다는 것이 이런 .. 2022. 8. 31.
이영숙 시인(장흥) / 수염 틸란드시아 외 1편 이영숙 시인(장흥) / 수염 틸란드시아 구름 방석에 가부좌로 북상하는 노승의 옆모습에 길게 늘어뜨린 폭포 한줄기 흐른다 틸란드시아틸란드시아 폴란드시아폴란드시아 프라하의 가벼움으로 갈길을잃은 사람 바람개비처럼 힘을 주어 밖으로만나가려는 혁명가들의 외침 소리 약하게 강하게 또약하게 물비늘로 흩어지는 물고기들의 행진이다 아래로 흐르는 것이 진리이다 위로 상승하는 것은 꽃의 역류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튼이 만들어낸 과학적 허구일지도 그녀의 내면의 목소리에서 외치는 봄에 대한 갈망은 다르게 사는 것이 진리이고 사실이다는 것을 알았다 구름을 붙잡아 놓을 혁명가는 없다 수염 틸란드시아의 폭포수처럼 한곳에만 떨어지는 진득한 믿음은 없다 오직 한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사는 그녀만의 특별한 존재의 무거움.. 2022. 8. 31.
이상은 시인 / 묵언 외 3편 이상은 시인 / 묵언 공동현관문을 열었을 때 공동전둥이켜졌다 나는 계단으로 올라가고 너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공종에서 제외된, 오직 없음이 남았다 한글맞춤법처럼 또박또박 살았을 수행 원칙으로 하되 예외를 허용하기도 하는 모호한 규정 탓에 자주 사랑도 틀렸다 절없이, 하고 싶은 말이 간절하게, 듣고 싶은 말이 지금은 가독이 불가한 시절 견디고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더 견디고 있을 생이 어디쯤 있다는 것 나는 알고 있으면서 너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서자 새들도 떠나갔다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중이다 말도 없이 너는 원칙적으로 나는 예외적으로 생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상은 시인 / 부딪치고 싶은 별이 내게 오고 있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황홀한 직진이 내게 오고 있다 어두운 밤이어서 다행히 길을 잃.. 2022. 8. 31.
이제니 시인 / 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 외 1편 이제니 시인 / 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 기분 나무는 구름의 영토 서쪽끝에 도열해 있었다 그늘 밑에는 알파카 나의 알파카가/ 어느새 우리는 구름의 영토 끝까지 날아왔구나 무구한 검은 동공이 소용돌이치며 연관 없는 어휘들의 밤 위로 날아오를 때 너는 어리지 않다 너는 늙지 않았다 너는 아직 늙지 않았다 꼭짓점과 모서리들이 멀어진다 나는 몇 개의 점과 선과 면을 간단히 밀어낸다 발밑에는 줄지어 누워 있는 녹색의 풀 구름의 무덤 곁에선 녹색의 목소리가 나는 이 생을 두 번 살지 않을 거야 완전히 살고 단번에 죽을 거야 알파카 나의 알파카 아름다운 얼굴이 그 여린 솜털이 부드러운 바람에 조용히 흩날릴 때 나는 지구의 회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의 여백을 믿는다 나무의 수맥을 따라 흐르는 물결 너머 테두리를 잊은 .. 2022. 8. 31.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수명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수명 가톨릭신문 2022-08-28 [제3308호, 15면] 물건 잘 관리해 오래 사용하듯 몸·마음도 관리 잘하며 돌봐야 특히 약한 것이 사람의 마음 욱 하면 쉽게 소모되고 무너져 물건에는 사용기간이 있습니다. 물건의 수명이지요. 물건을 오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아껴 쓰고 잘 관리를 해줘야 합니다. 아주 오래된 차를 가진 분들을 보면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심지어 차에 이름을 붙여주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이 정도로 해야 오래 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함부로 쓴 사람들은 수명이 짧습니다. 몸에 해로운 것들을 몸이 싫어하건 말건 쏟아 부은 사람들은 병이란 대가를 치르고 심지어 일찍 죽기도.. 2022. 8. 31.
이영숙 시인(청주) / 사자는 짐을 지지 않는다 외 1편 이영숙 시인(청주) / 사자는 짐을 지지 않는다 낙타는 제 어미의 어미처럼 짐꾼 앞에 무릎 꿇고 등을 주지만 사자는 제 어미의 어미처럼 그 누구에게도 몸을 굽히지 않는다 채찍을 기억하는 낙타는 채찍 안에서 자유를 찾지만 정글을 기억하는 사자는 자신에게서 자유를 찾는다 낙타는 짐꾼을 기억하며 무릎을 꿇고 사자는 초원을 기억하며 무릎을 세운다 사자는 절대로 짐을 지지 않는다 이영숙 시인(청주) / 봄날에는 이른 봄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꽃바람이고 싶다 당신의 빛으로 채색된 꽃잎 속을 물결처럼 드나들며 향기로운 은혜의 집을 짓고 싶다 삶의 갈피마다 뽀얀 흙먼지를 씻어내며 봄비이고 싶다 청결한 언어와 마음으로 깨끗한 기도를 드리며 출렁이는 강물로 흐르고 싶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연둣빛 싹을 틔우는 투명한 햇살이고 .. 2022. 8. 31.
김용옥 시인(익산) / 새들은 제 이름을 모른다 외 5편 김용옥 시인(익산) / 새들은 제 이름을 모른다 학소암을 둥글게 품은 산 학산에 올라 깐깐한 껍질의 소나무가 바늘잎을 떤다 바람보다 먼저 잡목이 소소소 소근거린다 잡목숲 소나무숲에 박새 딱새 딱따구리 직박구리 후투티 제 목소리 제 몸짓으로 인사를 한다 새의 이름을 불러도 새들은 대답이 없다 사람이 사람끼리 분별하라고 이름 지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모른다 김용옥 시인(익산) / 검둥개 기억속의 검둥개를 꺼내어 상처에 연고인 양 바르며 동행을 한다 우리집 검둥개는 꼬마소녀의 단짝동무, 마당의 수돗가 감나무 위로 달빛 뽀시락거리며 내리면 가늘고 기일게 고음으로 누군가를 참, 그리워했다 유리창을 투과한 겨울햇볕 아래서 검둥개를 끌어안고 동화책을 읽으면 참, 온몸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런 검둥개가 어느 날 집으.. 2022. 8. 31.
김이듬 시인 / 삼월은 붉은 구렁을 외 1편 김이듬 시인 / 삼월은 붉은 구렁을 나는 이 구렁텅이가 싫지 않아요 삼월은 붉은 구렁을 흘러넘치게 하죠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넌 쉽게 눈에 띄어 그러나 아무도 우릴 구별 못 할걸 그래서 뭐 동생이 탕 안에 똥을 싸는 바람에 우린 ㅉᅩᄌ겨났어요 발가벗은 채 탈의실에 누워 눕자마자 배가 고파요 다시 면접과 위생 검사 등급 판정을 기다려야 해요 의사는 내 피를 한 번 태반 추출물을 세 번 뽑아갔어요 넌 죽지 않을 거야 더럽다고 태만하다고 때려죽이지 않을 거야 내가 구해줄게 동생이 날 달랩니다 잘 자 우리는 두 개의 캐비닛 안에 침상을 배정받았어요 오 제발 수용소 격리 시설로 보내달라고 애걸했지만 시간은 호송 열차처럼 달리고 언제나 자격 미달 함량 초과 안전도가 미심쩍은 우리는 툴툴거립니다 꿀꿀댄다고 하는데.. 2022. 8. 31.
김이강 시인 / 소독차가 사라진 거리 외 4편 김이강 시인 / 소독차가 사라진 거리 방과 후에는 곤충채집을 나섰지만 잡히는 건 언제나 투명하고 힘없는 잠자리였다 우리는 강가에 모여 잠자리 날개를 하나씩 뜯어내며 투명해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익사한 아이들의 몸처럼 커다란 투명 정환이네 아버지 몸처럼 노랗게 부풀어오르는 투명 직전의 투명 우리는 몇 번씩 실종되고 몇 번씩 채집되다가 강가에 모여 저능아가 되기를 꿈꾸는 날도 있었지만 우리들의 가족력이란 깊고 오랜 것이라서 자정 넘어 나무들은 로켓처럼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아침이면 정확히 착지해 있곤 했다 몇 번의 추모식과 몇 번의 장례식 몇 개의 농담들이 오후를 통과해가고 낮잠에서 깨어나면 가구 없는 방처럼 싸늘해졌다 우리에게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방과 후면 우리는 소독차를 따라다니며 소문을 퍼뜨리고 .. 2022. 8. 31.
벼리영 시인 / 우탁 선생 외 8편 대상 수상 벼리영 시인 / 우탁 선생 문희공 자취를 읽다 1. 사인암 푸르른 솔 돌이 된 캔버스에 초록 꽃 돋아난다 우뚝 선 기암절벽 절리에 새긴 충심 훈풍을 몰고 온 당신 천년 사표 되셨지 목숨을 구걸 않는 서슬 푸른 지부상소 한 시대 곧은 족적 남기는 담론 하나 투명한 운선계곡에 획을 크게 긋는다 문희공 씨앗 되어 다시 핀 초록 나무 너럭바위 쉬다 보니 풍화에 찢긴 세간 난세를 한탄하면서 탄로가를 읊는다 2. 구계서원 세상을 지펴 놓고 천년을 향해 가는, 질곡으로 거듭난 고유한 서화 한 폭 진덕문 들어선 선비 추경 속에 물들다 널따란 마루 건너 모현사(우탁 선생 사당) 찾아드니 모과 향 피워 놓고 낙엽을 태운 시월 역학을 읽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린다 당신을 흠모하며 노랗게 물든 서정 후대에 울림 되는.. 2022. 8. 31.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착한 목자 수녀회(상)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착한 목자 수녀회(상) 상처받은 여성들 영혼 구원에 헌신 가톨릭신문 2022-08-28 [제3308호, 4면] 창립자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수녀. 착한 목자 수녀회의 뿌리는 성 요한 에우데스(John Eudes, 1601~1680) 신부에게서 출발한다.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 에우데스 신부는 사제가 되고 45년 동안 전교여행을 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전했다. 그는 전교여행 중에 성매매를 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을 만났다. 여성들은 이전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노력했지만 빈곤과 사람들의 냉대로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다. 에우데스 신부는 자신의 죄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결심하고 1641년 애덕 성모 수녀.. 2022. 8. 31.